'창공에 높이 솟은 지리산 바라보라. 천고의 비밀이 그 속에 잠겨있네…'로 시작되는 校歌교가를 부르며 3년 동안 여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정작
지리산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대원사 계곡에 발을 담그고 돌아오는 한나절의 소풍 장소로만 기억될 뿐, 지리산은 가까우면서도
너무나 먼 곳에 있는 산이었다.
그 산이 너무 높고 험준해서 해마다 몇몇 인명을 앗아가곤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기에, 나에게 지리산은 언제나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솟아있었다.
눈 덮인 천왕봉을 멀리 바라보며 성장기를 보내고도 그 품에 한 번 안겨들지 못한 지리산. 그 위풍당당한 남자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겨울.
그러나 그 겨울의 산행은, 눈보라에 쫓겨 정상에 잠깐 서 보기만 했을 뿐 지리산의 넉넉한 산세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언젠가는 백여 리 주능선을 타고 지리산 전체를 조망하리라 싶었으나 그 기회는 예상 밖으로 일찍 다가왔다. 이름하여 지리산 縱走종주.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보통 1,5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을 여남은 개 이상 오르내리며 지리산의 넉넉함을 한껏 느껴볼 참이었다.
빨아 마시고 싶도록 싱그럽고 푸른 5월. 꽃보다 아름다운 나무의 어린 잎새들이 5월의 숲에 번창하고 있었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으로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코스가 여기서 시작된다.
1박 2일의 산행 준비물이 담긴 배낭은 15킬로그램에 육박했다. 침구며 우의, 식량, 랜턴, 오버트로저, 게다가 더운 날씨를 대비해 2리터의 물까지 짊어지니 허리가 휘청했다.
왼쪽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걸으면서 호기 있게 내디딘 발걸음은 두어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느려지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작열하는 태양, 땅에서 후끈 솟아오르는 지열. 끝없이 물을 요구하는 내 몸에 맞추다 보니 피가 묽어지는 느낌이었다.
법계사를 넘어서자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지만, 사실은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산행의 시작이었다. 가파른 돌길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10미터 전진에 3분 휴식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 9킬로미터. 4시간을 걸어서야 겨우 당도했지만 정상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득시글거렸기 때문이다. 5월의 마지막 주말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이 떼지어 몰려와 있었다.
4년 전 처음 밟았던 천왕봉은 눈보라 속에 휩싸여 천지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 겨울의 추위 때문에 잠시 발 한번 디뎌보고 쫓기듯 내려온 천왕봉이 오늘은 밝은 햇살 아래 온몸을 드러내고 있다.
해발 1,915미터, 넓이 1억3천만 평에 둘레가 백여 리나 된다는 지리산.
크고 작은 봉우리로 뻗어 나간 15개의 능선은 또 수십 개의 깊은 계곡을 만들고, 그 계곡 발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기대고 살아간다.
소설 '남부군'과 '토지'의 무대로,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기구한 역경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茶차문화의 발생지며 민간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한 지리산은 판소리 문학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춘향과 이도령이 사랑을 나눈 장소가 남원에서 지리산 정령치에 이르는 곳이며, 실제로 춘향의 묘도 지리산 자락에 있다.
변강쇠와 옹녀의 질퍽한 사랑 이야기도 뱀사골과 백무동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흥부가의 원고장도 운봉 여원치에서 함양 팔랑채까지다.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자 문화의 보고로 자리잡은 지리산, 천왕봉 정상 돌부리에는 天柱천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늘 기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천왕봉은 높고 영험한 봉우리라는 뜻일까.
천왕봉 아래 通天門통천문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거대한 돌문 아래를 통과하면 하늘기둥이 있다. 남한 제2봉 지리산 정상을 극존칭으로 묘사한 단어가 아니고 무엇이랴.
중산리에서 정상까지 4시간여. 가파른 돌길과 땡볕을 견디며 올랐지만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장장 40여 킬로미터의 능선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제석봉, 연하봉, 삼신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벽소령, 형제봉, 삼각봉, 명선봉, 토끼봉, 삼도봉, 반야봉, 임걸령, 노고단. 지리산에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 개가 넘는데, 크고 작은 봉우리까지 합하면 백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수많은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어, 지리산은 그 높이만큼이나 아득하고 그 넓이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6.25의 상흔을 비롯해 이념과 갈등과 왜침의 수난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던 산. TV극 '여명의 눈동자'의 라스트신을 비장하게 장식했던 그 산.
그러나 1996년 5월 하순의 지리산은 아무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옷을 다 입은 산이 그 모든 상처와 허물을 다 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사목 지대로 유명했던 장터목에는 명물이었던 고사목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고사목을 베어낸 자리에 어린 구상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꽃을 보러 간 것은 아니지만, 세석평전에 이르렀을 때 진달래가 만발해있어 기뻤다. 드넓은 세석평전이 모두 흐드러진 진달래였다. 바알갛게 물든 평원을 보며 살아있는 날들이 축복으로 여겨졌다.
세석산장에서 하루를 묵었다.
새로 지은 산장은 외관과 내부 모두 깔끔했지만, 등산객을 모두 수용하기엔 부족한 듯했다. 옛날 산장으로 쓰던 곳을 어렵게 구해 잠을 청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정신이 새록새록 맑아지는 것이었다.
거의 뜬눈으로 침낭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지리산의 깊은 숨소리를 엿들었다.
이튿날 새벽 다섯 시. 출발 준비를 서두르면서 나는 어지러웠다. 어제 더위를 무릎 쓰고 강행군한 탓에 몸이 상당히 지쳐 있었는데 잠까지 못 잤으니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장장 10시간은 넘을 텐데, 출발부터 이렇게 나약하면 안되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내색하지 말자. 이를 악물고 선두에 서서 걸었다. 편도선이 부어 침 삼킬 때마다 고역이었다.
덕평봉 아래 선비샘에서 아침을 먹었다. 차가운 샘물은 흐트러진 내 몸에 팽팽한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새로 짓고 있는 벽소령 산장을 보며 형제봉을 넘고 연하천 산장에 이르렀다. 안개와 노을[煙霞연하]로 지리십경에 든다는 곳. 산장지기 털보가 마음이 넉넉해 보여 좋았다.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천왕봉이 저만큼 솟아있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반야봉과 노고단이 유난히 내 시선을 끌었다.
다른 산봉우리와는 특이하게 구별되는 반야봉은 영락없이 엉덩이 모양이었다. 그 산 정상에는 구상나무 군락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지만, 내 미천한 지식은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주목을 쉽게 구별할 재간이 없었다.
토끼봉을 지나면서부터 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둑후둑 빗방울은 더위를 가시게 해주었지만 示界시계가 운무로 가리워 혼돈스러웠다. 산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흙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발걸음이 신선해졌다.
화개재에 이르렀을 땐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비닐로 포장을 치고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산은 이제 비에 완전히 갇혔다.
세상사 세옹지마라더니 궂은 것이 좋을 때도 있나 보다. 어제의 더위에 지친 몸에 산비는 오히려 시원한 청량제가 되었다. 만약 연 이틀 땡볕이었다면 걷기도 힘들고 탈수 현상이 왔을지도 모른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의 3도 경계가 되는 삼도봉에 이르렀을 때는 비가 개어 있었고 노고단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다.
임걸령 샘터에서 발을 씻으며 뼈 속 깊은 차가움을 느꼈지만, 이 샘터에 아픈 곳을 담그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싶어졌다.
임걸령에서 노고단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가도 될 정도로 순탄한 길이었다. 산비도 완전히 개이고 시야는 한 눈에 탁 틔었다.
드디어 노고단.
비 내린 뒤의 운해는 일품이었다. 구름 속에 첩첩 산들이 가라앉은 듯 떠오르는 듯,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빛살을 내뿜어 저 멀리 덕유산 능선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산 넘어 산, 저 산 넘어 또 산… 우리네 인생엔 80%가 산인지도 모른다. 산과 산 사이엔 언제나 迷妄미망의 구름과 안개가 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따르면 그만인 게다.
높은 산 위에서 보면 봉우리만 떠올라 보일 뿐이듯이 인간사도 멀찌감치서 바라보면 큰 일만 눈에 띄겠지. 작은 일에 속상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한번쯤 이렇게 높은 산에 올라볼 일이다.
지리산 연봉이 구름에 잠긴 모습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지리십경의 하나로 치는 老姑雲海노고운해를 본 것만으로도 지리산종주의 의미를 얻을 수 있겠다.
신라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이었다는 노고단은 국가의 안녕을 빌며 제를 지낸 곳이다. 높이 쌓아 올린 제단이 그 옛날의 민간신앙을 유추하게 한다. 가뭄이 들어도, 홍수가 나도, 전쟁이 발발해도,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와 제를 올렸을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며 나도 노고단에 한 가지 소망을 올리고 싶다.
이 건강한 다리로 오래오래 이 땅의 산들을 밟게 하소서.
노고단 운해는 눈 아래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있었다.
나도 세상 인연과 까마득히 멀어진 것 같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산의 등뼈를 모두 밟고 나니, 산이 내 품안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종주의 묘미가 여기 있는 것일까. 그 넓은 산자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지도를 펴놓고 산맥 이름을 익히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태백산맥의 등뼈를 중심으로 갈비뼈 같은 작은 산맥 이름들을 외느라 쩔쩔매던 기억. 지리산 등뼈 위를 걸으며 그 등성이에서 갈라져 나간 계곡들을 헤아려본다. 칠선계곡, 백무동, 한신계곡, 뱀사골, 피아골… 그 깊은 계곡마다 민족의 한과 애환이 서리서리 맺혀 있겠지.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담고 지리산은 오늘도 묵묵히 구름 속에 잠겨 있다. 숱한 발길들이 짓밟거나 말거나 산은 그 자리에 언제나 의연할 것이다.
그 산이 너무 높고 험준해서 해마다 몇몇 인명을 앗아가곤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기에, 나에게 지리산은 언제나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솟아있었다.
눈 덮인 천왕봉을 멀리 바라보며 성장기를 보내고도 그 품에 한 번 안겨들지 못한 지리산. 그 위풍당당한 남자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겨울.
그러나 그 겨울의 산행은, 눈보라에 쫓겨 정상에 잠깐 서 보기만 했을 뿐 지리산의 넉넉한 산세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언젠가는 백여 리 주능선을 타고 지리산 전체를 조망하리라 싶었으나 그 기회는 예상 밖으로 일찍 다가왔다. 이름하여 지리산 縱走종주.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보통 1,5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을 여남은 개 이상 오르내리며 지리산의 넉넉함을 한껏 느껴볼 참이었다.
빨아 마시고 싶도록 싱그럽고 푸른 5월. 꽃보다 아름다운 나무의 어린 잎새들이 5월의 숲에 번창하고 있었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봉으로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코스가 여기서 시작된다.
1박 2일의 산행 준비물이 담긴 배낭은 15킬로그램에 육박했다. 침구며 우의, 식량, 랜턴, 오버트로저, 게다가 더운 날씨를 대비해 2리터의 물까지 짊어지니 허리가 휘청했다.
왼쪽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걸으면서 호기 있게 내디딘 발걸음은 두어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느려지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작열하는 태양, 땅에서 후끈 솟아오르는 지열. 끝없이 물을 요구하는 내 몸에 맞추다 보니 피가 묽어지는 느낌이었다.
법계사를 넘어서자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지만, 사실은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산행의 시작이었다. 가파른 돌길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10미터 전진에 3분 휴식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 9킬로미터. 4시간을 걸어서야 겨우 당도했지만 정상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득시글거렸기 때문이다. 5월의 마지막 주말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이 떼지어 몰려와 있었다.
4년 전 처음 밟았던 천왕봉은 눈보라 속에 휩싸여 천지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 겨울의 추위 때문에 잠시 발 한번 디뎌보고 쫓기듯 내려온 천왕봉이 오늘은 밝은 햇살 아래 온몸을 드러내고 있다.
해발 1,915미터, 넓이 1억3천만 평에 둘레가 백여 리나 된다는 지리산.
크고 작은 봉우리로 뻗어 나간 15개의 능선은 또 수십 개의 깊은 계곡을 만들고, 그 계곡 발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기대고 살아간다.
소설 '남부군'과 '토지'의 무대로,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기구한 역경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茶차문화의 발생지며 민간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한 지리산은 판소리 문학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춘향과 이도령이 사랑을 나눈 장소가 남원에서 지리산 정령치에 이르는 곳이며, 실제로 춘향의 묘도 지리산 자락에 있다.
변강쇠와 옹녀의 질퍽한 사랑 이야기도 뱀사골과 백무동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흥부가의 원고장도 운봉 여원치에서 함양 팔랑채까지다.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자 문화의 보고로 자리잡은 지리산, 천왕봉 정상 돌부리에는 天柱천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늘 기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천왕봉은 높고 영험한 봉우리라는 뜻일까.
천왕봉 아래 通天門통천문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거대한 돌문 아래를 통과하면 하늘기둥이 있다. 남한 제2봉 지리산 정상을 극존칭으로 묘사한 단어가 아니고 무엇이랴.
중산리에서 정상까지 4시간여. 가파른 돌길과 땡볕을 견디며 올랐지만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장장 40여 킬로미터의 능선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제석봉, 연하봉, 삼신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벽소령, 형제봉, 삼각봉, 명선봉, 토끼봉, 삼도봉, 반야봉, 임걸령, 노고단. 지리산에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 개가 넘는데, 크고 작은 봉우리까지 합하면 백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수많은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어, 지리산은 그 높이만큼이나 아득하고 그 넓이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6.25의 상흔을 비롯해 이념과 갈등과 왜침의 수난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던 산. TV극 '여명의 눈동자'의 라스트신을 비장하게 장식했던 그 산.
그러나 1996년 5월 하순의 지리산은 아무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옷을 다 입은 산이 그 모든 상처와 허물을 다 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사목 지대로 유명했던 장터목에는 명물이었던 고사목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고사목을 베어낸 자리에 어린 구상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꽃을 보러 간 것은 아니지만, 세석평전에 이르렀을 때 진달래가 만발해있어 기뻤다. 드넓은 세석평전이 모두 흐드러진 진달래였다. 바알갛게 물든 평원을 보며 살아있는 날들이 축복으로 여겨졌다.
세석산장에서 하루를 묵었다.
새로 지은 산장은 외관과 내부 모두 깔끔했지만, 등산객을 모두 수용하기엔 부족한 듯했다. 옛날 산장으로 쓰던 곳을 어렵게 구해 잠을 청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정신이 새록새록 맑아지는 것이었다.
거의 뜬눈으로 침낭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지리산의 깊은 숨소리를 엿들었다.
이튿날 새벽 다섯 시. 출발 준비를 서두르면서 나는 어지러웠다. 어제 더위를 무릎 쓰고 강행군한 탓에 몸이 상당히 지쳐 있었는데 잠까지 못 잤으니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장장 10시간은 넘을 텐데, 출발부터 이렇게 나약하면 안되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내색하지 말자. 이를 악물고 선두에 서서 걸었다. 편도선이 부어 침 삼킬 때마다 고역이었다.
덕평봉 아래 선비샘에서 아침을 먹었다. 차가운 샘물은 흐트러진 내 몸에 팽팽한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새로 짓고 있는 벽소령 산장을 보며 형제봉을 넘고 연하천 산장에 이르렀다. 안개와 노을[煙霞연하]로 지리십경에 든다는 곳. 산장지기 털보가 마음이 넉넉해 보여 좋았다.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천왕봉이 저만큼 솟아있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반야봉과 노고단이 유난히 내 시선을 끌었다.
다른 산봉우리와는 특이하게 구별되는 반야봉은 영락없이 엉덩이 모양이었다. 그 산 정상에는 구상나무 군락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지만, 내 미천한 지식은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주목을 쉽게 구별할 재간이 없었다.
토끼봉을 지나면서부터 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둑후둑 빗방울은 더위를 가시게 해주었지만 示界시계가 운무로 가리워 혼돈스러웠다. 산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흙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발걸음이 신선해졌다.
화개재에 이르렀을 땐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비닐로 포장을 치고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산은 이제 비에 완전히 갇혔다.
세상사 세옹지마라더니 궂은 것이 좋을 때도 있나 보다. 어제의 더위에 지친 몸에 산비는 오히려 시원한 청량제가 되었다. 만약 연 이틀 땡볕이었다면 걷기도 힘들고 탈수 현상이 왔을지도 모른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의 3도 경계가 되는 삼도봉에 이르렀을 때는 비가 개어 있었고 노고단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다.
임걸령 샘터에서 발을 씻으며 뼈 속 깊은 차가움을 느꼈지만, 이 샘터에 아픈 곳을 담그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싶어졌다.
임걸령에서 노고단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가도 될 정도로 순탄한 길이었다. 산비도 완전히 개이고 시야는 한 눈에 탁 틔었다.
드디어 노고단.
비 내린 뒤의 운해는 일품이었다. 구름 속에 첩첩 산들이 가라앉은 듯 떠오르는 듯,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빛살을 내뿜어 저 멀리 덕유산 능선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산 넘어 산, 저 산 넘어 또 산… 우리네 인생엔 80%가 산인지도 모른다. 산과 산 사이엔 언제나 迷妄미망의 구름과 안개가 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따르면 그만인 게다.
높은 산 위에서 보면 봉우리만 떠올라 보일 뿐이듯이 인간사도 멀찌감치서 바라보면 큰 일만 눈에 띄겠지. 작은 일에 속상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한번쯤 이렇게 높은 산에 올라볼 일이다.
지리산 연봉이 구름에 잠긴 모습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지리십경의 하나로 치는 老姑雲海노고운해를 본 것만으로도 지리산종주의 의미를 얻을 수 있겠다.
신라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이었다는 노고단은 국가의 안녕을 빌며 제를 지낸 곳이다. 높이 쌓아 올린 제단이 그 옛날의 민간신앙을 유추하게 한다. 가뭄이 들어도, 홍수가 나도, 전쟁이 발발해도,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와 제를 올렸을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며 나도 노고단에 한 가지 소망을 올리고 싶다.
이 건강한 다리로 오래오래 이 땅의 산들을 밟게 하소서.
노고단 운해는 눈 아래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있었다.
나도 세상 인연과 까마득히 멀어진 것 같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산의 등뼈를 모두 밟고 나니, 산이 내 품안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종주의 묘미가 여기 있는 것일까. 그 넓은 산자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지도를 펴놓고 산맥 이름을 익히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태백산맥의 등뼈를 중심으로 갈비뼈 같은 작은 산맥 이름들을 외느라 쩔쩔매던 기억. 지리산 등뼈 위를 걸으며 그 등성이에서 갈라져 나간 계곡들을 헤아려본다. 칠선계곡, 백무동, 한신계곡, 뱀사골, 피아골… 그 깊은 계곡마다 민족의 한과 애환이 서리서리 맺혀 있겠지.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담고 지리산은 오늘도 묵묵히 구름 속에 잠겨 있다. 숱한 발길들이 짓밟거나 말거나 산은 그 자리에 언제나 의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