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시멘트로 처바른 절, 동화사(桐華寺)가 보기 싫어서 팔공산에 안간지 오래다.

실로 3년여 만에 다시 팔공산 자락을 찾아드니 그 넓은 품은 여전히 아늑했다.

신라 5악(五岳)의 하나였던 팔공산은 영남에서 빼어난 명산이다.

원효와 의상이 수도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두 스님의 발자국이 안 스친 곳이 거의 없다.

혹시 후세 사람들이 두 스님의 유명세를 이용한 건 아닐까?

아니라면 두 분의 신통력이 워낙 출중해서 축지법을 사용해

팔도강산 곳곳에 절도 짓고 수행도 했나보다.




은해사를 지나 갓바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계단을 30여분 올라 갓바위로-

막다른 산정 암릉 위에 우뚝 앉아계신 돌부처님은 머리 위에 갓을 쓰고

왼쪽으로 약간 기우뚱한 모습으로 수심에 잠겨계셨다.

산정의 바위를 다듬어 불상과 좌대를 만든 모습이 특이한데,

정성껏 빌면 한 가지 소원만은 꼭 들어주신다고 한다.

(부처와 보살을 구별하는 방법은 머리 모양에 있다.

부처님은 파마머리, 보살님은 관을 쓰고 계신다.)



불상 아래 엎드린 수많은 중생들은 끊임없이 약사여래불을 외고 있다.

몇 년전보다 불상이 좀 더 기우뚱해진 것 같고, 수심이 깊어 보인다.

하긴, 저 많은 중생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자면 부처님인들 얼마나 고민이 많을까?

수명장수 소원, 시험 합격 소원, 로또복권 당첨 소원까지 다 들어주자면

부처님 신통력에도 한계가 느껴지실 게다.

그래서 나는 소원을 빌지 않고 가볍게 합장만 하고 물러나왔다.



갓바위에서 동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암릉미가 대단하다.

희고 매끈한 바위들이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짙푸른 숲과 어우러져있다.

걷고 또 걷고, 건너뛰고, 기어오르고, 매달리고...

대구 시가지가 조망되는 지점.

전망바위에서 내려다보는 팔공컨트리클럽엔

몇몇 부르조아들이 한가롭게 파리채(?)를 휘두르고 있다.

동봉 저 아래 보기 싫은 동화사, 그 너머 대구 시가지가 스모그 속에 잠겨있다.

동봉까지 가자니 원점회귀가 부담스러워 은해사 쪽으로 길을 잡았다.



펑퍼짐한 바위 틈에 ‘만년송’으로 이름 붙은 소나무.

팔공산에서는 그런 나무가 잘생긴 축에 드는지 모르겠지만

내 보기엔 울산근교 영남알프스 일원의 소나무가 훨씬 낫다.

가지산 북릉의 쭉 뻗은 소나무, 영취산 일대의 적송...

운문사 처진 소나무를 팔공산 만년송과 빗대기는 너무 야박한 것 같고.



내 생각엔 만년송이 너무 늙은 것 같다.

둥치에 비해 잎이 너무 허술하여 탈모증 걸린 머리 같고

솔방울을 유난히 많이 단 것이 수명이 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종족보존의 본능은 대단하다고 한다.

그래서 식물도 죽기 전에는 종자를 퍼트리려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나?

바위틈에서 모진 비바람을 이기며 수백년 살아왔을 저 소나무,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싯귀가 문득 생각났다.

자연에 순응하는 나무들처럼 나도 자연스럽게 살고싶다.



은해사까지 내려가면 돌아올 차가 마땅치 않을 것 같아 중암암만 보기로 한다.

얼마전 석가탄신일에 텔레비전에 방영되어 더욱 유명해진 중암암(中岩庵)은

‘돌구멍절’로 통하기도 한다.

십수미터 바위 쪼개진 틈 사이가 사람이 옆으로 서서 겨우 통과할 정도인데

죄 많은 사람은 이 틈을 통과하지 못한다나, 어쩐다나? (나는 통과했다!!!)

세 번 통과하면 극락을 간다면서 할머니들이 억지로 바위틈을 비집는데

보는 사람이 안타까워 땀이 날 정도다. 극락 안가고 말지 왜 저 고생을 하남?

(살찐 사람은 절대 통과하지 못할 정도의 작은 틈이다. 왕언니는 과연?)



중암암에서 또 유명한 건 우리나라 사찰에서 가장 깊다는 변소.

푸세식도 아니고 수세식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연발효 천연화장실인데

정월초하룻날 대변 보면 섣달 그믐날 저 아래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나?



김유신이 수련했다는 암자, 그래서 장군수라는 물도 유명한데

입구의 낡은 석탑을 보니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산자락이 넓고 골이 깊다보니 팔공산에는 크고 유명한 사찰이 많다.

동화사, 파계사, 은해사... 시멘트만 처바르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걸.

나는 개인적으로 고답적이고 퇴락한 사찰 분위기를 좋아한다.

절은 절다워야지 번쩍번쩍 동기와 얹고 시멘트를 처바르면 싫다.

불교 발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해도 내심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갔던 길을 되짚어 능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

밤꽃 향기 더덕 향기 사이로 뻐꾸기 울음이 유난히 외롭다.

해가 길어져서 6시간 산행해도 아직 한낮의 햇살이 남아있다.

갓바위 부처님께 마음으로 빌었다.

“이 죄 많은 중생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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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싸지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내 마음에 불을 지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불의 뫼(火旺山.757m)를 찾아 고속도로를 달리며 가슴속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성냥만 그어대면 한순간에 타버릴 정도로 내 가슴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오늘, 정월대보름. 화왕산을 태우는 불길에 가슴 속 응어리를 모두 태워버리자.
끊지 못한 인과(因果)와 애증(愛憎)을 함께.

화왕산 정상을 가장 쉽고 빠르게 오르는 길을 버리고 옥천리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관룡산이 한눈에 다가온다.
기묘한 바위들로 관(冠)을 쓴 관룡산,
아기자기한 그 바위 능선을 넘어가면 5만6천평의 화왕산 억새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리라.
단숨에 그를 만나기보다는 멀리서 아주 멀리서 천천히 다가가며 보고 싶었다.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던 관룡사는 불사(佛事)가 진행중이라 경내가 산만하다.
기와불사에 시주를 권하는 천막을 지나
시멘트와 모레 무더기를 밟고 약사여래불을 배알할 수 있다.
낡은 기둥과 퇴락한 단청 위에 기와만 새로 올린 모습이 한복 치마에 모자를 쓴 듯 어색하다.

가파른 오르막을 30분쯤 치고 오르니 처마 끝의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한 절벽에
작은 암자가 걸려있다. 청룡암이다.
어느 풍수가 터를 잡았는지 몰라도 '기도발' 잘 받게 생겼다.
저토록 가파른 절벽 끝에 암자를 지은 정성을 봐서라도 부처님이 돌봐주시겠지.

계룡산 모처에 가면 기도발 잘 받는 자리를 사고 판다.
벼랑 끝 앞이 탁 트이고 높다란 자리에서 기도하면 기도발을 잘 받는다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것이지 부처도 하느님도 마음에 있는 게 아니던가?

암자를 지나 넓은 바위에 서니 용선대 석가여래좌상이 건너다 보인다.
관룡산 정상에서 뻗어내린 산줄기 끝에 봉안된 불상은 암반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계신다.
이 불상에 광배(光背)가 없는 이유는 관룡산이 그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란다.
기막힌 해석이요 멋드러진 풍수다.

아기자기한 바위 봉우리를 지나 위험천만한 꼭대기를 넘어 관룡산 정상에 이르자
동쪽으로 화왕산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정상 부근에 널따란 분지를 두고 산 둘레는 모두 급경사 벼랑으로 이루어진 화왕산.
오늘 저녁 저기서 산정의 불놀이가 펼쳐지리라.

한발한발 화왕산을 향해 나아간다. 수만평 억새 바다에 빠지러 간다.
가슴 가득 억새를 안고 있는 화왕산성을 밟아본다.
하늘금을 이룬 산성 위를 걸으니 발길이 허공을 딛는 기분이다.
진흥왕 때 대가야를 정복하기 위해 축성되었다는 화왕산성은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이 내성을 축조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던 산성은 오늘날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배바위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오색 깃발이 나부끼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산정은 잔치 분위기다.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 부럼을 나누어주는 사람, 소원풀이 짚단을 파는 사람, 달집에 부적을 거는 사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카메라의 도열이다.
달집 사르기와 억새 태우는 장면을 찍기 위해 일찌감치 산을 오른 사진작가들은
삼각대를 세우고 앵글을 고정한 채 산정을 지키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구도를 잡기 위해 더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아침 일찍 산을 올랐을 그들.
한 점의 작품을 얻기 위해 추위에 떨면서 오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은 그 열정이 부럽다.

세상에 불 구경만큼 재미진 게 없다더니, 산정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니 입이 쩍 벌어진다. 억새보다 사람 숫자가 많은 듯하다.
배바위는 물론 건너편 정상과 이어진 봉우리마다 사람들로 빼곡하다.
3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행사이니 학수고대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억새밭에 불을 지르는 것은 화왕산의 산채가 풍성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지만,
이 산에 불이 나면 풍년이 들고 나라가 평안하다는 전설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게는 가정의 액을 물리치라는 염원이 담겨있고,
크게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지만
감히 누가 산 하나를 태워버릴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마침내 해가 질 무렵 억새 태우기가 시작된다.
원뿔 모양의 달집을 태우고 억새밭 가장자리에 붙은 불은 삽시간에 안으로 번져나간다.
방화선 안에서 숨죽이며 기다리던 억새들이 화르르 타오르며 맹렬한 불길이 달려간다.
오랜 가뭄에 바싹 마른 억새들은 잠깐 사이에 재가 되고 요원(燎原)의 불길은 하늘로 솟구친다.

바로 그때 폭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폭죽이 터져 오른다.
눈 앞에는 시뻘건 화염, 머리 위에는 현란한 불꽃놀이.
갑자기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해발 750미터 눈 앞에서 터져오르는 불꽃놀이는 상상도 못했다.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은 억새밭의 불길을 무색하게 만들며 엄청난 밝기로 산정을 제압한다.

하늘에서는 천둥 같은 폭발음과 현란한 불꽃놀이, 땅에서는 솟구치는 불기둥...
산 전체가 화산 폭발하듯 한 순간에 타오르며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 아찔한 오르가즘에 도달하기까지 불과 5분.
모든 것은 순식간에 타오르고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억새밭을 맹렬하게 달려가던 불길도, 천둥같은 폭죽 소리도.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사람들은 남아있는 불씨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도 한동안 충격 속에 멍하니 서 있다. 방금 내가 본 게 현실이었나, 착란이었나?

환장고개를 넘어 자하골로 하산하는 인파를 보며 우리는 배바위 동쪽 능선을 타기로 한다.
달이 뜨지 않으면 어떠랴,
마음 속에 달 하나 품고 배바위를 넘을 때 내 발길은 구름 위에 있는 걸.
함께 걷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와 손전등에 위안을 느끼며 걸어가는 산길.
잔설이 남은 암릉은 미끄럽고 위험했지만 야간산행의 묘미가 짜릿했다.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미는 보름달이 얄미운 애인 같다.
내 품에 확 안기면 좋으련만, 올듯 말듯 추파를 던지며 따라온다.

배바위에서 버들재까지 2시간을 걸어오다 보니 건너편 자하골에는 손전등 불빛들이 정체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화왕산까지 가장 가깝다는 4Km의 그 길은 하산하는 인파로 꽉 막혔을 게다.
뒷날 얘기 들어보니 그날밤 100m 내려가는데 1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서두르지 말자. 가장 가까운 길이 때로는 가장 먼 길이 될 수도 있다.
욕심부리지 않고 느긋하게 걸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이른다. 내 몸이 조금 더 고달프면 된다.
편하게 빨리 성취하리란 생각만 버리면 세상이 편안하다.

정월 대보름, 산정의 불놀이는 내 가슴에 선명한 충격으로 남았다.
누군가의 가슴에 싸지르고 싶었던 불도, 내 가슴에 지폈던 불도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맹렬하게 타올라 순식간에 꺼져버린 산정의 불꽃처럼
애증도 인과도 한 순간 재가 되는 날이 오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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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계곡에 붙은 고유명사 중 가장 그럴듯한 이름, 용소골.
그야마로 용이 살았을 것 같은 시퍼런 용소가 기괴함을 자아낸다.
수년 전만해도 교통의 오지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응봉산, 그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용소골은 남한에 마지막 비경이 분명하다.
강원도 삼척과 경상북도 울진의 경계에 자리한 응봉산을 오르기 위해 덕구온천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두 시.
선잠에서 깨어나 바라본 하늘은 한꺼번에 쏘아올린 폭죽처럼 찬란한 별꽃들이 허드러졌다.
별빛에 의지해 산길을 걷기엔 너무 이른 시간. 해드랜턴에 드러나는 숲은 청신하게 살아있다. 알싸한 수풀 향기가 한순간 내 몸의 바이오리듬을 되살렸다.
잠든 숲을 깨워 나무와 눈 맞추며 오르는 산길, 응봉산으로 오르는 길은 하이킹 코스처럼 편안했다. 가파르고 위험한 길에 스릴을 느끼는 사람들에겐 다소 지루할 정도로.
정상에서 일출을 볼 요량으로 가다 쉬다 하면서 능선에 붙었다. 저 멀리 히붐하게 밝아오는 새벽이 겹겹이 둘러싸인 산과 산 아래 깃든 마을을 정답게 내놓는다.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주변 산세를 관망한 뒤 작은당귀골로 내려섰다. 가파른 내리막 끝에서 말로만 듣던 용소골 계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용소골에는 제대로 된 등산로가 거의 없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그대로 통과해 절벽에 붙었고 수십미터 낭떠러지 위를 기었다.
계곡의 물 속에는 다슬기가 까맣게 붙어 있는데, 고기들은 사람을 피해 달아날 줄도 몰랐다. 이승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때묻지 않은 자연 앞에서 나는 처녀지에 온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어림잡아 백 여 미터는 될 듯한 절벽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크고 작은 소(沼)와 폭포는 그 절벽들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태고적 용암이 분출된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 그야말로 자연미의 극치다.
길 없는 길을 찾아 계곡을 걸으며 배낭을 머리에 이고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물을 건넜다. 빠른 물살이 온 몸을 훑어갈 땐 팽팽한 긴장과 스릴이 느껴졌다.
아, 이 짜릿한 느낌. 살아있는 순간의 행복.
물을 건너 닿은 바위에는 이따금 광맥이 보였다. 그 옛날 중석광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가파르고 위험한 협곡에 누군가 발파작업을 시도했던 듯 군데군데 억지로 뚫어놓은 듯한 길이 이곳의 사연을 짐작케 한다.
덕풍마을 민박집 주인 말로는 이곳이 산판길이었다는데, 깊은 산중에서 나무를 메어내 마을로 나르느라 그랬는지 계곡 중간중간에 휘어진 레일이 어색하게 버려져 있었다.
천불동, 칠선계곡 그 어느 곳도 용소골에 견줄 수 없다. 설악이나 지리산이 높다 하여 두 계곡을 손꼽지만 사람의 발길에 이미 닳을대로 닳아 이젠 저자거리의 여인처럼 평범하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용소골은 아직 처녀였다. 가끔 그녀를 흠모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살짝 잡혀줄 뿐, 그녀의 입술도 그녀의 가슴도 열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정하게 여민 그녀의 앞가슴인지도 몰랐다.
앞서 간 등산객들이 나무에 묶어놓은 시그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용소골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산로가 없다시피 해서 신발을 신은 채로 물속을 걸어야 했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을 건너 절벽을 올라야 했다.
시퍼런 용소가 입을 벌리고 있는 절벽 위를 게걸음으로 통과했다. 자일을 걸어둔 사람이 고맙기 짝이 없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시퍼런 용소에 그대로 빨려들어가 버릴 듯하다.
발 아래 검푸른 물을 내려다보며 아슬아슬한 낭떠러기 절벽 위를 걷는 기분이라니... 위험이란 때로 인간에게 자극적인 쾌감을 주나 보다. 계곡을 통과하는 데 여섯 시간이나 걸렸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물 속에 서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아,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남아있다니!"
이름난 계곡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짓밟아 자연은 점점 훼손당하고 있는데 아아, 그래도 용소골만은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구나. 덕풍마을 민박집에 들러 막걸리 한 되를 청했다.
점심을 먹고 있던 주인은 수박 한 통까지 덤으로 주며 김치 안주를 내놓았다. 막 버무린 강원도 김치의 질박한 맛이라니.
손님에게 술을 내고도 술값 계산에 신경 쓰지 않는 민박집 주인이 너무나 친근하고 정답다.
덕풍에서 풍곡계곡으로 내려오는 길, 해는 중천에 떠 있고 하얗헤 바랜 비포장도로는 후끈후끈한 지열을 내뿜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물 속에 풍덩 몸을 던졌다.
차고 맑은 기운이 온몸에 퍼지면서 한순간 절정을 느꼈다. 황홀한 전율이 왔다.
초가을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물 속을 유영하는 내 몸은 청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여름의 휘날레는 너무나 찬란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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