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굶은 지 한달.
마약을 끊은 사람이 이리 괴로울까. 사막에서 물을 찾는 심정으로 산을 그린다.
세상 인연이 깊다 보니 원치 않던 일에 끌려들게 되어
Nine To Nine으로 한달을 보냈나 보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바람이 앞장서는 길을 따라 도래재를 넘어 표충사 주차장에 이른 시각이 9시20분.
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면서 친구는 필봉 가는 길을 묻는다.
주차장 옆으로 산길을 치고 올라가고 싶다나. 주인은 그쪽에 길이 없다는 대답이다.
계단식 밭에 엉성한 농막과 짐승을 사육하는 시설들이 흩어져있는 산기슭.
초입부터 길 없는 길을 잡았으니 오늘 일정이 내심 불안하다.
무조건 따라 나선 길이니 친구의 안내를 따를 수 밖에.
취나물이 제법 자랐다. 부지깽이 나물을 한껏 뜯는다. 우산나물도 꺾는다.
노란 양지꽃 무리, 보라색 봄구슬봉이, 철 이른 각시붓꽃도 피었다.
시야가 트일 즈음 오른쪽 건너편으로 거대한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그 바위 사이에 숨겨진 폭포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우람한 근육 사이에 내밀하게 숨어있는 2단폭포. 주왕산 2폭을 연상케 한다.
산은 연두빛 새순들로 아우성이다. 저마다 사랑해 사랑해 외치고 있다.
눈 닿는 데마다 배고픈 꽃 진달래, 산벗나무만 저 혼자 화사하다.
길을 알고 가는 게 아니고 느낌으로 가는 거라고 친구는 말한다.
산맥이 어디로 뻗어있다는 걸 아니까 찾아가는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헐레벌떡 오르다 보니 필봉이다. 능선에서야 비로소 알겠다.
저 건너 구천산, 그 아래 우리가 넘어온 도래재, 남명 일대의 평화로운 풍경...
한달전 정승봉에서 도래재 건너 사자봉을 올랐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보다 산 빛이 좀 푸르러졌다. 억새 사이로 새순이 많이 올라왔다.
필봉 근처에서 비로소 사람을 만났다.
부산의 모 산악회에서 왔다는 사람이 돗질산을 아느냐고 묻는다.
남암산에서 흘러내린 지맥이 돗질산에서 끝난다고... 그게 남암지맥이라고...
1대간 1정간 12정맥의 이름도 다 못 외우는 내가 지맥을 알리가 있나.
산맥의 흐름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도로를 건너 마을을 지나가는 무슨무슨 지맥에 나는 별로 흥미 없다.
사자봉엔 바람이 대단하다.
어디 마땅히 앉아 밥 먹을 데가 없다. 배꼽시계는 밥을 조르는데.
드넓은 사자평을 굽어보며 도시락을 푼 시각이 12시20분.
새벽같이 일어나 구운 쪽갈비에 싱싱한 미나리로 황제의 식탁을 마련한다.
쐬주 한잔에 쪽갈비 한대, 친구는 쐬주 서너잔을 연거푸 마신다.
그리고 가슴에 담았던 얘기를 털어놓는다. 죽어도 못잊을 사람을 이야기한다.
평생 상처로 남아있을 아픈 추억에 대해 나는 주제 넘는 참견을 한다.
“그 상처가 지금은 네 마음에 흉터겠지만, 언젠가는 무늬가 될 거야.
아니, 무늬가 되도록 만들어야 해.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줄 거야.“
우리는 최영미 시인의 ‘흉터와 무늬’를 이야기한다.
사자재에서 표충사로 내려갈까 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재약봉을 보러 간다.
스리슬쩍 수미봉을 넘고 고사리분교까지 단숨에 내려간다.
그 옛날 풍금이 있던 자리는 어디였을까. 친구는 고사리분교의 풍금소릴 들었단다.
재약봉으로 가는 길에서 잠시 착오가 있었다.
그 작은 착오는 시간 지체로 이어졌고 엄청난 체력소모를 가져왔다.
소나무 우거진 산등성이를 곧장 넘어간다는 것이 왼쪽으로 한참 휘돌았다.
가시에 찔리며 넝쿨에 긁히며 재약봉에 오른 시각이 3시 부근.
발아래 배내골 백련 일대가 한가롭게 누워있다.
친구는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탐욕스럽게 바라본다.
내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저 혼자 향로봉까지 갔겠지.
재약봉에서 표충사로 하산하는 길에 만난 조망 하이라이트.
아스라이 떨어지는 층층폭포와 주변 풍광이 줌렌즈를 당긴 듯 확 다가온다.
한순간 숨이 탁 막히며 가슴 속에 전율이 느껴진다.
디카를 꺼내 바위 전망대 위에 납작 엎드린다.
드디어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건지나 보다!
그런데 아뿔사... 카메라에 밧데리 저전압 경보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예비 밧데리를 갖고 왔어야지... 이 얼치기 초보 찍사 바보 멍청이!
화면이 나오지 않는 디카로 사진 2장을 찍었다.
국제신문 노란 시그널을 따라 희미한 하산길을 밟는다.
향로봉을 마주보고 내려가다 길을 한번 놓치고 다시 되돌아온다.
가파른 경사도에 수북한 낙엽, 고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아무래도 늦겠다. 내가 먼저 내려가서 차를 가져올테니 천천히 와.”
해는 기우는데 갈길은 멀고... 친구의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뛰다시피 산길을 내려가는 친구의 모습은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그늘진 숲길을 휘적휘적 혼자 걸어간다.
등산로 끝에서 사자평 임도를 만나 이제 좀 편안해졌나 했더니
이상하게도 그 길은 오르막으로 치닫는다. 계곡과도 점점 멀어진다.
물 흐르는 방향은 표충사 쪽이 맞는 것 같은데 임도가 왜 오르막일까?
임도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갔던 길을 되돌아 계곡으로 접어든다.
길은 없지만 물 따라 내려가면 표충사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계곡을 이리저리 건너뛰며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혹시 중간에서 길이 끊기면 어쩌나. 친구를 못만나면 어쩌나.
며칠전 내린 비로 계곡의 물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시퍼렇게 흐르는데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해가 지고 있지 않는가. 숲속에는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데...
내가 하산하지 않으면 친구는 조난 신고를 할까? 아니면 끝까지 기다릴까?
허겁지겁 물을 건너 희미한 토끼길을 밟기도 하고,
누군가 갈아놓은 산비탈 사래긴 밭도 지나간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니 그제야 안심이 된다.
혼자 숲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긴장되게 했는지
볼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호흡은 가쁘다. 내 숨소리가 나를 놀라게 한다.
커다란 돌배나무에 하얗게 만개한 배꽃이 나를 놀리는 듯하다.
계곡의 물이 유순해지나 싶더니 마침내 사람 소리가 귀에 들린다.
임도를 걸어 내려오던 등산객이 뜨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일찍 내려와 계곡물에 머리까지 감은 친구는 느긋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넘었다.
“한달만에 산에 온 나를 9시간이나 끌고 다녀서야 되겠니?”
“나도 이렇게 오래 걸릴줄 몰랐다. 사실은 나도 몇 년만에 왔거든.”
소진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사자평 명물식당에 들어선다.
솔잎을 띄운 막걸리에 도토리묵을 안주로 하산주를 기울인다.
오늘 산행도 내 인생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겠지.
잔 위에 하얀 배꽃이 우수수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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