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Collections for Kang Ok"
하얀 CD케이스에 적힌 글씨. 작년 6월, 첫만남을 기념하여 K가 만들어준 CD를 플레이어에 건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녹음한 CD를 선물하는 게 취미라던 그 사람. 지금까지 수십 장의 CD를 만들었다고 했지.

첫 곡으로 조수미의 "Love is just a dream"
'꿈이었나, 나를 떠난 날이...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어...'
바닥에 앉아 천천히 무릎을 굽히면서 뒷꿈치를 엉덩이 쪽으로 끌어당긴다. 90도.... 110도 쯤에서 더 이상 무릎은 굽혀지지 않고... 다시 다리를 뻗고 쉬었다 서서히 굽히며 같은 동작 반복.
노래를 들으며 나는 무릎 재활운동 첫 단계로 들어섰다.
K는 모르겠지. 그가 녹음해준 음악들이 재활운동 보조 프로그램으로 쓰일 줄은.

Leonard cohen의 "Nancy"
막내동생이 좋아했던 노래.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듯 노래하는 레오날드 코헨의 저음이 오늘따라 더 묵직하다. 마치 내 다리처럼.
두 번째 재활운동은 다리를 곧게 편 상태에서 대퇴근에 바짝 힘을 주는 것.
수술 후 4주 정도면 근육의 40%가 손실된다고 한다. 재활운동으로 근육을 되살리지 않으면 회복이 그만큼 어렵다고...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나는 재활운동을 시작했다.

한영애의 '건널 수 없는 강'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목소리. 터프하고 반항적인, 그러면서도 섹시한 음성의 한영애.
다리를 편채 바닥에서 20센티쯤 들어올려 잠시 멈췄다 내리기 반복.
한 곡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한가지씩 재활운동을 하기로 했다. 지루하지 않게.
얼마전, 무릎환자를 위한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스키 타다가, 축구하다가, 발레하다가 무릎을 다친 사람들... 생각 외로 많았다. 국내외 유명선수들의 일화, 유명 의료진 리스트까지... 상세한 자료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재활운동도 거기서 배웠다. 동병상린의 심정으로 그 많은 자료를 인터넷에 올려놓은 사람이 고맙기만 하다.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노래는 서서 들어야 제맛이다. 뒷꿈치를 들어 엉덩이까지 한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잠시 멈춤.
다리가 덜덜 떨린다. 몇 번 계속하니 반대편 무릎에도 통증이 온다. 한쪽 다리에 하자가 생기니까 반대편 다리에 체중이 쏠려 성한 다리조차 아프다. 휴~ 땀 난다.
수술 전에 내가 그 홈페이지를 보았다면 수술하는데 신중을 기했을 거다. 혹 주변에 무릎 수술을 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뜯어말리고 싶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Celine Dion의 "My heart will go on"
아들이 노래방에 가면 잘 부르는 노래. 타이타닉 주제곡으로 쓰였지.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바다 위에서 연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디카프리오... 진실한 사랑은 그렇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아낌없이.
두 무릎을 30도쯤 구부리고 잠시 정지, 다시 제 자리로... 아이구, 더 힘들다.
노래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5분12초, 아휴, 너무 길어!

햇빛촌의 "유리창엔 비"
빗방울이 떨어지는 어느 봄날이 그려진다. 후리지아 향기가 어디선가 풍기는 듯.
엎드려서 다친 다리를 쭉 펴고 위로 들어올린다. 잠시 정지 후 다시 내리고...
정상인이라면 식은죽 먹기겠지. 하지만, 하지만...내 다리는 어렵게 올라간다. 나도 몰래 신음소리가 난다. 끙~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진땀이 다 난다.

"Free as the wind"
영화 '빠삐용' 주제곡으로 삽입됐던 음악. 자유를 향한 빠삐용의 야망이 느껴진다. 바위 절벽에서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장면, 망망대해를 향해 방향도 없이 떠가던 그 남자의 자유혼.
마무리 운동으로 의자 끝에 걸터앉아 다리 들어올리기. 바닥과 수평일 때 멈추었다 다시 내려놓는다. 이쯤이야 싶었는데 열 번쯤 계속하니 무릎에서 신호가 온다.

몇 가지 동작을 계속하는 동안 음악은 내 마음보다 몸을 치료해주고 흘러갔다.
"누님, 좋아하는 음악 제목을 적어주시면 며칠 내로 녹음해 드릴게요."
K의 천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 맑고 깨끗한 사람이다. 그가 나에게 CD를 전해줄 때처럼 나 또한 그에게 받을 것을 생각지 않고 주고 싶다.
(웬만큼 다리가 나으면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잔 거하게 하자구! 노래 잘하는 와이프도 함께 와. 자네는 기타를 치고, 우리는 노랠 부리지. 작년 6월, 처음 만났을 그때처럼 말야.)

 

 

<하루하루가 기적같아라>

 

"우측 슬부 전방 십자인대 파열 및 반월연골 파열"
의사의 소견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연골(물렁뼈)이 찢어졌다는 얘기다. MRI 판독 결과 수술 안할 수는 없다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사연을 얘기하자면 타임머신 타고 2년반 전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어쨌든 나는 벌써 세 번째 무릎 부상을 입은 거였다.

"40대 여자분이 이렇게 많이 다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이 보통 이 정도 부상으로 수술하지요."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얌전하게 보이는 아줌마가 왜 다쳤을까?)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참담했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왜 하필 나야? 왜? 왜?
세상 모든 사람이 다리 멀쩡하게 잘 걸어다니는데 왜 내 황금의 다리만 고장이 난 거야?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나는 수술대에 누웠다. 무릎에 구멍을 뚫고 관절경을 삽입해서 생체 인대를 이식하는 수술, 물렁뼈를 깁는 수술. 전신마취 3시간 이상의 고난도 수술이었다.
마취에서 쉽게 깨어나지 못해 혼났다. 남편과 내 친구들이 눈을 까뒤집고 뺨을 때리고 야단법석을 부렸다. 12년전 제왕절개 수술할 때만 해도 마취에서 쉽게 깨었는데...그때만 해도 젊었던가? 어느새 내 몸은 가을이었다.

수술 후 만 하루만에 침대에서 내려섰더니 병실 동료들이 깜짝 놀란다. 사흘 정도는 누워 있어야 한다나?
치료하면서 붕대를 풀어보니 내 무릎에는 구멍 뚫린 자국이 네 군데였다. 이제 스커트 입기는 텄다. 하긴,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 나이에 치마를 입겠냐만.
정형외과 수술이 참 많이도 발전했나 보다. 깁스 과정을 생략하고 보조기를 착용하라고 한다. 무릎 뼈를 고정시키는 장치로서 2주 정도는 무릎에 차고 다녀야 한다고.

무릎 수술에서 자타가 공인한다는 대학병원 교수님 왈, 수술은 성공적이나 연골 때문에 상당기간 조심을 요한다고... 무리한 충격을 주지 말라나? 3개월 후면 조깅할 수 있단다.
병실에 있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온 게 신기했고, 하루하루가 기적 같았다.
병실환자 7명 중에 교통사고 환자가 3명이었는데, 무면허 음주운전 차량에 받쳐 7번 수술을 받은 환자, 학교 가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치여 9시간 대수술 받은 여학생... 등등 목불인견의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재활의학과를 통해 우리 병실에 하룻밤 묵다 떠난 22살의 처녀는 뇌성마비였는데 갑자기 근육이 경직되면서 발잘을 일으키는데 그 부모들이 붙잡고 울면서 이러는 거였다.
"울지 마라. 아가... 네가 자꾸 울면 바다에 빠트려 버릴거야.... 다른 환자들이 잠 못자잖니."
그 부모의 가슴은 아마도 새까맣게 타버렸겠지.

새삼스럽게 나와 내 가족이 그동안 누려온 건강과 행복이 귀하게 느껴졌다. 아니, 나의 현재 처지가 전혀 비관스럽지 않았다. 남편이나 아이가 다친 것보다는 낫다. 다리를 절단한 것 보다는 낫다. 석달동안 산에 못간다고 어디 덧나나? 기나긴 인생에서 3개월, 별 거 아니야!
소설가 양귀자가 '모순'에서 이런 말을 했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 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친정이며 시댁 주변에서 놀랄까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입원했는데,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온동네 여자들이 위문공연 한번씩 다 다녀가고... 나는 참 행복했다.
더군다나 산사랑 울산 회원들의 기발한 위문공연은 나를 눈물짓게 했다.
싱싱한 가을 전어에다 오징어회, 병실에 금지된 쐬주까지 사 들고 위문공연을 벌인 산고동과 구드리, 주전바다님... 병실에 길다란 의자 펴놓고 환자 보호자 다 모아놓고 술판을 벌이다 인턴들한테 쫒겨날 뻔했다.

평소 보석의 품위 유지에 대해 각별히 신경 쓰는 산그늘 님은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으로 내 불면의 밤을 채워주었고.... 결정적으로 산골소녀의 선물이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장식용 초 3자루와 프랑스산 적포도주를 들고온 산골소녀, 퇴원하기 전날 밤에 병실의 형광등을 모조리 끄고 그 촛불을 밝혀 포도주 파티를 벌였다.

다리병신 팔병신 허리병신 모두 모여 포도주 한잔씩 하고 분위기에 취해 노래까지 불렀다.
나더러 퇴원 기념 노래 한 곡조 하래서 '제비처럼'을 신나게 불렀다. 앵콜은 당근이었쥐~
간호사가 달려왔다. "정형외과 여자 환자가 술 파티하는 건 첨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심각한 후유장애가 예상되는 환자들이었지만 마음이 참 밝은 사람들이었다.
이 험난한 세상, 하루하루 무사히 살아있는 게 정말 기적같다고 입을 모은다.

나 역시 지난 8년동안 멋모르고 이산 저산 쏘다닌 세월이 고맙기 짝이 없다.
오늘 퇴원해서 집에 와 가장 먼저 산사랑에 접속했다. 여기 있는 애인들이 그리워서....
1주일동안 병원에서 4백만원 깨먹고 돌아왔지만 아깝지 않다. 4천만원, 아니 4억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산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맞지? 산친구 여러분, 내 말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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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쓴 단편소설입니다.
'개천예술제'에서 수석 당선한 글인데, 읽어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유치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했습니다. 30년도 넘어 누렇게 빛 바랜 교지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 글이 실려있군요.

**************

순이는 시골 외딴 집에서 산다. 아빠와 엄마와 동생 석이와 산다.
아빠는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아서 그날 하루 먹을 양식을 장만해 오신다. 순이는 지금 석이와 아빠 마중을 나가고 있다.
"누나, 혹시 아버지 술 취하지 않으셨을까?"
"글쎄."
"술 취하심 큰일인데. 또 술이 막 취해서 엄마 때리면 어떡해?"
석이는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나쁜 아버지야 씨! 누난 아빠 밉지 않아?"
"안 미워."
"거짓말. 아빠가 술 취하시면 엄마 막 때리는데도?"
석이는 주먹까지 휘두르며 말한다.
"그만, 그런 말 하면 안돼."
"씨!"
석이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읍내 장터는 순이가 다니는 중학교도 있고, 고등학교도 있다.
순이네 집은 아랫마을과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휘날려갈 것만 같은 집이었다.
그런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순이는 중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아빠는 술만 취하시면 엄마와 순이를 못살게 굴었다.
미운 아빠, 정말 미운 아빠다.
하지만 아직 어린 석이 앞에선 차마 아빠가 밉다는 말은 못했다.
이런 저런 생각 하면서 순이는 어느듯 장터가 가까와 온 것을 알았다.
"석아, 저기 아빠가 계신다."
순이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빠는 술집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빠, 어서 집에 가세요."
"뭘 하러 왔니? 돌아가!"
혀가 다 꼬부라진 소리로 나무라신다. 석이는 실망하여 그 자리에 퍼져앉아 울기 시작한다.
"아버지 왜 그렇게 술이 취하셨어요? 아이참! 내일 아침은 또 굶겠네."
중얼거리며 소리쳤다.
"굶어? 내가 왜 굶어. 우리 부산댁이 옆에 있는데 내가 왜 굶어. 히히히 안 그래? 부산댁!"
'아이, 저리 치워요! 술냄새 나요."
부산댁은 아버지를 떠밀어 버린다. 아빠는 술이 취하신 터라 힘없이 풀썩 넘어지신다.
"아빠!"
순이는 달려가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며
"아빠 일어나세요. 장터에서 이게 무슨 창피에요?"
그리곤 순이는 부산댁에게 소리쳤다.
"아주머니, 돈 없다고 너무 괈 ㅔ마세요. 돈이 있을 땐 막 싸고 돌더니 돈 떨어지니까 이러기예요? 왜 , 왜 약한 우리 아빨 못살게 구는 거예요?"
"흥, 약해? 얘야. 어 아버지 좀 조심 시켜라. 골좀 작작 썩이라고 그래. 나도 너 애비한테 골 썩은 것만해도 어이구... 응...."
부산댁은 도리어 순이가 못마땅한듯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순이는 할 말을 읽고 말았다.
그래서 화풀이라도 할듯 아빠를 붙잡고 세게 흔들었다.
"아버지, 지금 엄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에요. 어서 가세요. 빨리요!"
순이는 애원하듯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
석이는 왼쪽 팔을 잡고 순이는 오른쪽 팔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가면서도 그냥 비틀거렸다.
마을 앞 동구밖까지 왔을 때, 아버지는 그만 물이 괸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초저녁이라 아직 어둡지도 않은데 빠지고 만 것이다.
그때 저쪽에서 영자 아버지께서 걸어오신다.
석이는 얼른,
"영자 아버지,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주세요."
영자 아버지는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다 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에이그, 이 친구야. 아 글쎄 왜 날마다 이 모양인가? 집에서 기다릴 마누라 생각 좀 해보게. 응? 이 사람아."
영자 아버지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아버진 웅덩이에 빠진채 꼼짝도 안하신다.
"이봐, 달삼이. 여편네가 기다린다고 했잖나."
영자 아버지는 몇번이나 말했으나 아버진 막무가내시다.
할수없이 영자 아버지와 순이는 있는 힘을 다해 웅덩이의 아버지를 끌어올렸다.
바지가 진흙 투성이었다.
순이는 영자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집에까지 부축하고 갔다.
싸리문을 들어서자 어머니께서 뛰어나오시며,
"또 취하신 게로구나."
불평투로 말하며 같이 아버지를 부축하고 마루까지 왔다.
그러자 아버진 기다렸다는듯이 마루에 벌렁 누워버렸다.
"에이그... 원 쯧쯧..."
영자 아버지는 혀를 차며 싸리문을 나섰다.
"예, 고맙습니다... 안녕히..."
어머닌 영자 아버지에게 다급히 인사를 끝내고 마루에 누운 아버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웅덩이에 빠져서 옷이 엉망이었다.
"엄마, 아빤 참 밉다. 그지?"
엄마는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어이구,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모양이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말끝을 맺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엄마, 울지마."
순이도 억지로 한마디했다.

이튿날
아버지는 소나기 그친 여름 하늘마냥 엊저녁과 딴판으로 엄마에게 말한다.
"여보, 엊저녁에는 나도 술이 너무 과했나 보우. 용서하구려."
아버진 여전히 읍내 장터로 나가셨다.
아버진 이상하시다.
술이 많이 취하신 날이면 기분이 좋아져서 돈을 마구 쓰신다. 그리곤 집에 와서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불을 덮어쓰고 주무신다. 그러나 술이 반쯤 취한 날이면 긴소리 잔소리 다 늘어 놓는다. 이럴 때면 엄마는 으례,
"술만 먹고 오면 글쎄 저렇다니까. 해서 안될 소린지 해서 될 소린지도 모르고... 어휴!"
"뭐? 내가 언제 잔소리했어?"
"왜 긴소리 잔소리 술만 먹으면 지랄이에요? 차라리 죽어 없어지지."
엄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린다.
"뭐? 오오라... 그러니까 넌 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 죽여라 죽여. 어서 죽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신다.
이럴 때면 석이는 마구 울고 순이는 말리느라 애쓰다가 아버지의 억센 팔에 맞기 일쑤였다.
오늘은 아무 이상 없으시다. 술도 취하지 않으셨다.
술이 취하지 않으시니까 밥도 많이 잡수신다.
엄마는 말씀하신다.
"그것봐요. 술을 안먹으니까 자연 밥을 많이 잡숫지 않아요. 밥을 많이 먹으면 몸에도 좋고..."
그러나 그것도 사흘이 못갔다.
아버지는 도 취하셨다. 그것도 많이 취하신 것이 아니라 약간 취해서 돌아오셨다.
"여보, 어쩌려구 돈을 다 써버렸어요? 내일은 순이 월납금도 가져가야 해요."
"월납금? 공부도 못하는 게 학교 다녀서 뭐해?"
아버진 공부하고 있는 순이 앞의 책꽂이를 들어 뜰에 팽개쳐 버린다.
"아버지!"
찢어질듯 부르짖으며 순이는 마당으로 내려와 책을 줍는다.
"주울 필요 없다. 너같은 건 학교 다닐 필요 없어."
하시며 맨발로 마당으로 내려와 책을 박박 찢으신다.
"아니, 저이가 미쳤나? 책은 왜 찢어 책은..."
엄마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순이는 순이대로 울며 책을 줍고 어머닌 어머니대로 아버지의 팔을 놓아주지 않으신다.
"이것 놓지 못해?"
아버지의 힘은 당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와 승강이를 벌이신다.
"아빠, 용서해 주세요. 아빠 엉엉..."
순이는 무턱대고 울었다.
울면 용서해주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를 사정없이 때리신다. 어머니는 울면서도 말하신다.
"월납금 안내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세상 천지에 어딨어요?"
"왜 없어? 공부만 잘해보라. 뭐라도 없는가?"
"왜 당신은 술만 먹으면 우리 가족을 못살게 굴어요? 차라리 나가든 죽든 하세요. 이젠 구역질 나요."
"아니, 뭐라고? 이년이 환장을 했군. 응?"
아버지는 더 세게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당기신다.
엄마도 이젠 더 참을수 없다는 듯 마구 아버지의 팔을 물었다.
순이도 석이도 가뜩이나 미운 아버지의 손을 손톱으로 마구 할퀴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힘은 어머니와 석이와 순이의 합한 힘보다 몇배다 더 세었다.
아버지가 한번 발로 차버리자 석이와 순이는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악마, 악마! 왜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거예요? 차라리 나를 죽이고 나가란 말이에요!"
약한 엄마이지만 이때만은 그렇지 않으셨다.
있는 힘을 다해 아버지의 눈을 쥐어박았다.
(눈을 못쓰게 해야 돼. 눈이 없으면 술이고 뭐고 못먹겠지.)
하는 생각만으로...
그러나 그것은 코끼리 앞의 비스켓 정도, 거센 아버지 앞에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진 어머니의 손목을 비틀고 말았다.
손을 비틀린 엄마는 마치 날개 잃은 백조처럼 맥이 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흥!"
아버지는 거센 숨소리로 흙이 뒤덤벅 된 발로 신을 신고 나가셨다.
이튿날 아침. 집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이의 찢어진 책을 어떻게하면 좋으냐는 어머니의 흐느끼는 물음에 순이는 우선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간신히 말했다.
"엄마 걱정 마세요. 까짓거 옆자리 짝궁과 같이 보면 되잖아요."
"휴!..."
어머닌 그저 한숨 뿐이시다.
그런데도 아버진 새벽녘에야 들어와선 밥도 안먹고 읍내로 나가셨다.

아버지는 며칠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술이 반쯤 취해서 돌아오셨다. 그러나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 육손이랑 나무하러 가야겠으니 돈 5천원만 주구려."
"돈이 어딨어요?"
"거 있잖아. 여름내 채소 팔아서 모아놓은 돈."
"안돼요. 그건... 내년 여름에 장사할 밑천이에요."
"장사? 장사는 내가 할테니까 당신은 잠자코 있어. 나만 장사 잘하면 당신은 마음대로 호강할 수 있어."
"............."
어머니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돈을 내주었다.
엄마는 지난 여름 가만히 앉아 놀고 먹을 수도 없고 해서 채소 장사를 한 것이다.
피땀 흘려 모은 돈 1만원, 그 중에서 반을 잘라 아버지의 자본으로 준 것이다.
어머니는 새벽차로 떠나라고 했건만 아버지는 꼭 이 밤으로 떠나야겠다고 하시며 싸릿문을 나섰다.
내일 모레 쯤은 꼭 돌아오마고 약속을 하시고...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이 잘못이었다.
이튿날 오후 5시가 채 되기 전에 아버지가 들어오신 것이다. 잔뜩 술에 취하셔서.
"아니, 웬일이에요? 여보! 이렇게 일찍 돌아오시다니... 그리고 나무는 어찌 됐어요?"
엄마는 다그쳐 물었으나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방에 그냥 쓰러져 주무시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순이는 겁이 덜컥 났다.
어머니는 순이더러 석이와 집을 보라 하시곤 빠른 걸음으로 싸릿문을 빠져나가셨다.
엄마는 뛰었다. 5리 되는 장터길을 빠른 걸음으로 달려 부산댁의 술집에 들어가 물었다.
"부산댁, 혹시 어제 저녁 우리 순이 아범 무슨 일 없었소?"
"아무 일도 없었어요."
퉁명스럽게 말하는 부산댁의 살짝 찢어진 눈동자 속엔 무엇인가 알고있는 듯한 야릇한 미소가 스친다.
"내가 모를줄 알아. 빨리 대! 빨리 대지 못하겠어?"
어머니는 부산댁을 꼬집으며 마구 큰소리를 질렀다.
'아야 아야 아야... 말.. 말할게요. 놔 줘요."
"그래, 어서 말해."
어머니는 숨을 돌리며 말했다.
드디어 부산댁은 할수없다는 듯 사실대로 자백했다.
'실은... 어젯밤새도록 화투를 했답니다."
"그래서?"
"돈 5천원을 다 날리고..."
"또?"
"육손이에게 5천원을 꾸어서 그것마저 잃었어요."
부산댁은 자기가 돈을 잃은 것처럼 힘없이 말한다.
"뭐? 아이고, 아이고... 분해라. 네 이년, 네가 노름을 시켰지? 그렇지?"
엄마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부산댁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었다.
"내가 언제 시켰어? 봤어? 봤단 말이오?"
"그래, 네가 시켰어. 분명히..."
"참 아주머닌 왜 나만 보면 신경질이에요? 하지 말라니까 자꾸 하는 걸 어떡해요? 네? 절더러 어떡하냐구요."
부산댁은 오히려 제가 잘한 것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는 대꾸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 틈에 모였는지 어머니와 부산댁의 주위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있었다.
어머니는 순간 놀라서 부산댁의 술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숱한 사람들 시선이 엄마의 뒤를 쫒아오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집으로 달려온 엄마는 우선 아버지를 찾았다.
당장에라도 깨물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치밀었던 것이다.
그러나 있어야할 아버지는 없어지고 이불을 개어놓은 자리가 엉망이고 장농 문도 열려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집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순이와 석이는 멍청히 넋을 잃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아니, 이.. 이럴 수가... 순이야 아버진 어디 가셨니, 응?"
"엄마. 아버진 나가셨어. 돈 5천원 가지고..."
힘없이 말하는 순이의 눈엔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뭐? 돈 5천원을?"
엄마는 놀래서 장농 밑을 뒤져보았다.
없었다.
5000원. 그게 어떤 돈인데...
어머니는 통곡을 하시며 운다. 눈이 퉁퉁 부어 앞을 잘 보지 못할만큼 울었다.
순이도 석이도 엄마따라 울었다.
미운 아버지! 생각할수록 괘씸한 생각만 고개를 쳐들 뿐이었다.
다음날 새벽 1시나 됐을까?
분함을 못이겨 밤을 지새고 있는 어머니 귀에 분명히 싸릿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다.
"뭘 하러 들어오는 거예요? 나가요! 나가!"
방문을 벌컥 열며 뜰로 나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순이는 잠이 깨었다.
아버진 술이 취하신 모양이다. 거센 어조로 엄마에게 대들었다.
"날더러 나가라고? 못나간다 못나가. 나갈라문 네가 나가라!"
"내 돈 내놔요. 내 돈! 내 돈 어딨어요!"
"돈 없다."
"어떡했어요? 빨리 내놔요. 여름내 피땀 흘려 모은 내 돈."
"빛 갚아줬다. 왜?"
"뭐라구요? 아이구... 그렇게 남의 돈이 눈에 왔다 갔다 하슈? 그렇담 나를 팔아다 노름을 해요. 어서요 어서."
어머니는 마루에 있는 칼을 들고 아버지에게 쥐어주었다. 정말로 죽이라는 것처럼.
순이는 놀래 뛰어 나갔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휙 스쳐갔다.
"이게 왜 이래, 응?"
아버지는 찌를듯이 덤벼들었다.
"죽여줘요. 죽여줘요! 소원이에요! 이젠 더 이상 살기 싫어요. 어서 죽여줘요. 어서!"
어머니는 고함을 질렀다.
"이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버지는 무턱대고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날랜 칼 아래는 순이가 끼어들었다.
어머니 대신 순이가 맞은 것이다.
칼은 순이의 어깨에 내려꽃혔다.
순간, 엄마와 아빠는 다같이 놀래어 순이를 불렀다.
어깨에서 쏟아지는 빨간 피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를 뿐 순이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말할 겨를도 없었다.
아버지는 순이를 등에 업고 병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울며 같이 뛰었다.
하늘은 시커먼 먹물을 부은 것같이 캄캄하다.
오늘따라 별도 나오지 않았다.
도무지 길을 분간할 수 없엇다.
그래도 순이를 업은 아버진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순이의 어깨에 흘러내린 피는 아버지의 옷에도 흘러내려 온통 피가 뒤범벅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저만치 하얀 건물이 희미하게 눈에 띈다.
새까만 천지에도 하얀 물체만은 희미하게나마 나타나 있었다.
병원에 닿은 엄마는 마구 병원문을 두들기며 큰소리로 의사를 불렀다.
"여봐요. 의사 선생님. 급한 환자입니다. 빨리 문좀 열어 주세요."
잠시후, 병원의 불은 켜지고 의사가 졸리운 눈으로 나왔다.
"이 아이를 보아주십쇼."
"아, 아니...이 피! 어쩌다가 이렇게 됐소? 어서 들어오시오."
의사는 얼른 순이르 수술실로 옮기라고 간호원에게 명령했다.
의사는 급히 서둘렀다.
순이는 수술실로 옮겨지고 아빠와 엄마는 병원 복도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게 되었다.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살인자! 당신은 살인자예요. 왜 저를 죽이지 순이를 죽이는 거예요? 당신은 교도소에 가야 해요."
"후... 그래, 난 살인자야. 내가 잘못한 거야. 천사보다 착한 우리 순이를 죽도록 만들다니...그리고 아무 죄 없는 당신을 괴롭히고..."
아버지의 눈엔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난 벌을 받아야 할 인간이야. 여보 순이엄마. 내가 죽거든 순이에게 말해주오. 이 애비가 죽을 죄를 지었더라고...
엄마는 돌아앉아 흐느껴 운다.
아빠도 슬픔을 참지 못해, 아니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앉아 울었다.

꼬끼오!
첫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순이가 들어갔던 수술실의 문은 열리고 의사가 한숨을 돌리며 나왔다.
"어떻겠습니까? 의사 선생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물었다.
"출혈이 매우 심하군요."
"에? 그럼 죽는단 말입니까?"
어머니가 놀래서 말한다.
"예... 그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수혈을 하지 않으면..."
"그럼, 이 병원에 피가 없나요?"
"네...우리 병원은 소규모라서..."
"큰 병원으로 옮기면 되잖습니까?"
"안됩니다. 가는 도중에 목숨이..."
"그렇다면 제 피를 뽑아 주세요."
"아닙니다. 제 피를..."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자기의 피를 뽑아달라고 의사에게 애원했다.
"두분의 의사가 그러시다면 할수없군요. 우선 혈액형을 검사하죠."
"순이는 나 때문에 죽게 됐어요. 나는 죽어 마땅할 놈이에요. 제 피를..."
"아니에요. 제 피를 뽑아 주세요. 순이는 제 대신 죽게 됐어요. 어서 제 피를 뽑아 주세요."
'아아. 서두르지 마세요. 결과는 혈액형 검사가 결정하니까요."
의사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간호원을 따라가라고 시켰다.
"간호원! 이 사람들 혈액형을..."
"네!"
얼마후 혈액형 검사 결과는 엄마였다.
결국 어머니가 순이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셈이었다.
"간호원, 속히 수혈 준비를 해놔요. 그리고 아주머니 잠깐..."
의사는 엄마더러 저쪽으로 가라는 시늉을 한다.
"아주머니, 제 말 명심해서 들어주십쇼."
병원 모퉁이에 선 의사는 아주 심각한 태도로 말한다.
"아주머니 딸은 출혈이 심합니다. 조금만 피를 더 흘렸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어요."
"........."
"만약에 아주머니의 피를 딸에게 수혈한다면 아주머니는 피가 모자라 혼수상태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보람은 순이에게 있어요. 이제까지 저는 순이 혼자 보며 살아왔답니다. 만약 걔가 죽는다면 나도 심장병으로 죽고 말거예요. 그러니 기왕 죽을 목숨 딸에게 바치겠어요."
'아주머니. 감격했습니다. 정말 감격했습니다...아주머닌 정말 마음씨가 비단같이 고우신 분이군요."
의사는 탄복한듯 어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곧 순이의 수술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기어이 숨지셨다.
손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다.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그리고 여보.. 순이가 깨어나도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완전히 나아 퇴원할 때, 그때 말해주세요. 이 못난 에미는 예쁜 순이 얼굴도 채 못보고 죽었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순이의 수술은 끝나고 입원실로 옮겨졌다.
순이는 정신을 차리고 부시시 눈을 떴다.
"엄마!"
"아, 순이야. 정신이 드니?"
"싫어요. 아빤 미워!"
순이는 휙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래, 이 애빈 못난 놈이야. 순이야. 이 애비가 밉지? 그렇지?"
"아...아니야. 아버지.."
"고맙다. 순이야. 용서해줘서..."
순이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무엇이 생각나는지
"참, 아버지. 엄마는 어디 갔어요?"
"으응.. 저..집에 가셨단다."
"그럼.. 석이는?"
"석이? 아참 석이를 집에 두고 왔구나. 순이야 가만 있거라. 내 곧 집에 다녀올게."
"응..."
아버지가 자리에서 막 일어서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아버지는 선채로 말씀하셨다.
다음 순간, 순이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순이의 입원실에 들어선 사람들은 영자 아버지와 석이가 아닌가.
"누나!"
"석이야!"
순이와 석이는 마구 울었다.
'어떻게 알고 왔나?"
반갑고 기쁜 가운데도 의아한 아버지가 물었다.
"부산댁을 통해 알았지. 어제 저녁... 아니, 새벽녘이지. 자네와 자네 부인이 순이를 업고 이 병원을 향해 뛰어가더라는구먼. 자세히는 못봤지만 꼭 그것이 자네 가족 같더라고 말이야."
"으응..."
"그런데, 이봐. 달삼이 자네 부인은 어찌 됐나?"
"쉿! 애들이 들어!"
"뭐요? 엄마요? 엄마는 어디 계세요?"
눈치 빠른 순이가 얼른 대꾸한다.
"으 으응... 저..."
머뭇머뭇 대답을 못한다.
"이 사람 어떻게 된건지 자초지종 말좀 해보게."
"잠깐 나가세. 내가 얘기해줄테니.."
아버지는 영자 아버지와 함께 나가신다.
"석이야. 이리 와 봐."
방에 혼자 남은 것을 알자 순이는 석이를 불렀다.
"왜 누나?"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
"응."
"그렇다면 저 열쇠 구멍으로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지 들어봐."
"뭘 하려고 그래?"
"엄마의 소식이 궁금해서 그래."
"좋아, 누나!"
석이는 누나가 시키는대로 열쇠 구멍으로 귀를 갖다대었다.
밖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또렷이 들려왔다.
"으음.. 안됐네 그려. 일평생 순이에게 의지하며 살았는데..."
영자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쉿! 음성을 낮추게. 애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네. 순이가 퇴원한 후에 말하라고 했으니까."
"알았네."
아버진 영자 아버지와 함께 복도로 걸어 저쪽으로 걸어가시는 것 같았다.
석이는 얼른 순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되셨대?"
"주...죽었대나 봐."
"뭐 죽었어? 엄마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순이는 그만 정신이 아찔했다.
잠시후 문이 열리며 아버니와 영자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 아버진 우리들에게 숨기는 게 있으시죠? 그렇죠?"
"내가 뭣을 숨겨?"
"거짓말, 아버진 거짓말장이... 엄마가 돌아가셨다는말도 안해 주시고.."
"뭐? 너희들 그 얘기 어디서 들었니?"
아버진 순이와 석이를 번갈아보시며 말씀하신다.
"그래요. 그랬군요. 역시 그랬군요."
순이는 흑흑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순이야. 진정해라. 운다고 살아오실 엄마가 아니잖아."
아빠는 순이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순이는 막무가내다.
머리 속에 가득찬 엄마 생각으로 순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칠사이가 없었다.

순이는 1주일 후 퇴원했다.
그러나 의사는 치료비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저어...선생님. 치료비는 얼마나 됩니까?"
짐을 다 꾸리고 난 아버지가 의사에게 물었다.
"입원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네? 걱정을 안하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주머니의 딸을 사랑하는 마음씨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희생. 그것이 바로 모정이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어머니. 전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아주머니의 그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해서 저는 입원비를 안받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에겐 굉장히 손해가 될텐데요?"
아버지는 그런 의사의 말을 한사코 거절했다.
"괜찮다니까요. 보아하니 돈도 많이 있을것같지 않으신데 그만 두시죠."
"그 그렇지만..."
"아아 괜찮다니까요."
의사는 아버지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아버지와 순이는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했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순이와 석이와 아빠는 그동안이나마 정들었던 병원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병원에서 쭈욱 올라가면 공동묘지가 있다.
수많은 영혼들이 잠자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무덤을 향해 아빠와 순이와 석이는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엄마의 무덤이었다.
엄마의 무덤 옆에는 소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고, 비석도 세워져 있었다. 소나무는 아버지가 심고 비석은 의사 선생님께서 주셨단다.
"아... 고마우신 선생님..."
의사 선생님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아버지와 석이와 순이는 옷깃을 여미며 엄아의 무덤 앞에 고개 숙였다.
"고마우신 어머니. 어머니가 살아만 계신다면... 흐흑..."
순이는 목을 놓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비록 땅 속에 묻힌 엄마지만 순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슬퍼하실까봐 조심스레 울었다.
순이는 가지고 갔던 장미와 백합을 비석 앞에 놓고 산을 내려왔다. 아바와 석이와 다정히 손목을 잡고...

순이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비록 엄마는 안계시더라도 지금 곁에는 아빠가 계시지 않은가....그리고 석이도..)
순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산 머리엔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짙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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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야, 쓰레기차 왔다."
새벽의 미명 속에서 갑자기 삼베폭을 찢어내는 소리.
달콤한 잠의 늪에 흠씬 빠져있던 나는 잠에 젖은 채 허우적 허우적 이불 속에서 기어나왔다.
"어째서 넌 날마나 깨워야만 일어나냐? 내 목에 피 올라오겠다."
반쯤 감긴 눈으로 쓰레기통을 더덤는데, 아침마다 꼭 그 시간에 재방송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쓰레기통 위에 묵직하게 떨어진다.
"두고봐라. 두고봐. 내가 이렇게 백수건달로 천덕꾸러기 취급은 받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청소차 뒤에 줄을 서면서 나는 이빨을 뽀드득 갈아부쳤다.
그래, 오늘이다. 오늘이야말로 어머니와 누이를 깜짝 놀라게 해줄테다. 그동안 나의 무능력과 무기력에 대한 온가족의 우려에 대해 내 오늘 감쪽같은 보상을 해주리라.
아아, 얼마나 고난에 찬 세월이었던가. 육순을 바라보는 노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이 누이 저 누이 용돈 받아가며 전문대학이라도 다닐 땐 그래도 좋았다.
졸업하고 내리 몇달을 놀기 시작하니 집안 분위기는 서서히 변해갔다. 어어, 이게 아닌데... 싶어셨겠지들.
누이들의 눈빛에서 실망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도 1년을 더 유유자적하고만 있었더니 온 집안의 탄핵이 퍼부어졌다. 나에게 붙여진 백수라는 별명도 그때 얻게된 것인데, 뼈 있는 농담 쯤으로 가볍게 받아넘겼던 그 백수가 어느새 내 진짜 이름을 깔아뭉개고 말았다.
어머니의 입에서마저 이젠 자연스럽게 백수야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누이들의 말인즉 이 집안에서 내가 필요한 건 쓰레기 비울 때 밖에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깐 쓰레기 비우는 일이사 여자들도 할수 있으니 염려말고 하루빨리 집을 떠나라는 주장이었다.
사내대장부답게 산천을 누비고 다니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한 마디로 탁 트인 남자가 되어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참 나이답지 않게 순진한 누이들.
아버지도 안계신 집안에 남자라곤 나 혼자 뿐인데 날더러 집을 나가라니... 그럼 이 집안은 어떻게 되겠는가? 한낮에도 사방에 늑개가 우글거리는 세상에 과년한 처녀가 셋이나 사는 집을 비무장지대로 그냥 두고 떠나다니...겨우 늙은 호랑이 한마리로 울타리를 지키게 놔두고 말이다.
누이들은 나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머니까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셨다.
내가 얼마나 어머니와 누이들을 사랑하는지, 호시탐탐 어진 양들을 노리는 늑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지.
이런 불타는 사명감 내지는 집안 유일의 남자로서 책임감 때문에 나는 이 좁은 땅덩이를 떠날수 없었고 따라서 취직자리가 서뜻 나서지 않았다. 오랜 기간 나는 고심했다.
누이들을 지키며 아울러 나 자신에게도 의미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그 끝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작가가 되는 길이었다.
작가가 되면 이 집안을 떠나지 않고도 일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알고보니 작가란 직업은 인류문화에 이바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정신노동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학서적을 높이 쌓아놓고 탐독을 거듭했따. 그리고 그것을 토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간 누차에 걸친 누이와 노모의 독촉, 단도직입적인 멸시까지 참으며 오늘날까지 내가 이 집안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나의 작가로서의 야망이 무엇보다도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1년여 동안 나는 펜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마침내 살을 저며내는 고통 끝에 한 작품을 얻기에 이르렀다.
열흘 전에 나는 산고를 치르며 낳은 아들을 신문사에 보냈다. 우체국 여직원의 존경스런 눈길을 느끼며...
신문사의 발표 날짜를 감안한다면 분명 오늘 안으로 당선자에게 개별통지가 와야 한다. 나는 벌써 당선소감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어쩌면 인터뷰를 위해 신문사에 직접 가봐야할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심장이 약하시니까 갑자기 놀래드리면 안되겠지. 아...마음 약한 누이들은 그동안 나를 구박한 게 얼마나 마음에 걸릴까?)
내가 라즈니쉬니 크리슈나무스티를 읽을 때
"백수, 형이상학적으로 즐기시네!"
하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던 셋째 누이는 얼마나 속이 아플까?
용서하자.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도록 하자.
오늘 내게 배달될 신춘문예 당선 통보야말로 오늘날까지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백수 이미지를 한순간에 뒤엎을 것이다.
하루종일 내 신경은 대문 밖으로 쏠려 있었다.
"양말용 씨, 당선 전보입니다."
골목 어귀로부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배달부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만 같다.
(일백만원의 상금은 고스란히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지만 다음 순간, 내가 적지 않게 신세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순간 나는 갈등을 느껴야 했다.
그들이 내가 당선된줄 알면 감꽃에 벌떼 달려들듯 모려올텐데... 그래, 은혜를 저버리면 안되지. 최소한 그들을 위해 맥주파티 정도는 열어주어야 할텐데... 나는 점점 심한 갈등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냐, 신세진 이웃이냐.. 그때였다.
"양말용 씨, 양말용 씨 계십니까?"
갈등의 크라이막스 부분에서 느닷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닷없는-이라론 했지만 사실 얼마나 저 목소리를 기다렸던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참아야 해. 작가란 모름지기 감정의 표현을 절제할줄 알아야 하니까. 나는 최대한의 무표정을 가장하고 밖으로 나갔다.
"양말용 씨 되십니까"
어? 그런데 그는 가끔 보이는 배달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점프 차림의 해말간 청년이었다.
그 순간 번개처름 스치는 생각.
(아, 그렇군. 신문기자로군. 신문사에서 시일이 급하니까 특파원을 보낸 게 분명해.)
그렇다면 이렇게 마당에 서 있게 할수는 없다. 주머니엔 달랑 담배값 밖에 없지만 어디 분위기 있는 다방에라도 가서 차를 마시자로 해야 겠다.
"제가 양말용입니다. 필명은 양현석이지요. 잠깐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 밖으로 나가실까요? 다방에라도..."
그의 얼굴에서 언듯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 알고 있습니다. **신문사에서 오셨죠?"
너같은 애숭이 기자쯤이야 첫눈에 알아본다는 듯이 나는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저, 사실은..."
그는 갑자기 굳어지는 듯했다.
"아, 잠깐 잠깐.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 서서 그런 얘기 하지 말고 우리 밖으로 나갑시다. 제가 좋은 곳을 안내하죠."
그의 눈동자가 넘점 확대되는 것 같았다.
햇병아리 기자라 할수없군. 하지만 최대한 잘 보여야지.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내 첫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그럴싸하게 나가야 할텐데.
"아, 저는 시간이 없는데요. 다른 집에 또 가봐야 하니까요."
청년이 멎적어하며 손을 내저었다.
"다른집? 아니 신춘문예 당선가가 나말고 또 있단 말입니까?"
"네?"
그와 나의 열띤 눈길이 마주쳤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저...뭔가 잘못 알고 계신가 봅니다..."
내 얼굴을 살피며 그는 가엾도록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저... 저는 이번에 **신문사 지국에 입사한 수금사원인데요. 이 댁에 신문대금 3개월치가 밀렸다고 해서... 저.. 그걸 받으러 왔을 뿐인데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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