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산 주능선과 통도사 전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조망터에서 나는 소리쳐 울고 싶었다.

연암선생처럼 "과연 큰 울음터로다!"

통도사 환종주의 백미를 보며 추위 때문에 꺼내지 못한 카메라를 마침내 꺼냈다.

(위 사진은 그날 내가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 아래 사진들은 질고지 님 작품)

 

 

 

 

동계장비로 중무장을 했어도 추운 날씨였다. 바람은 쌀쌀맞기 이를데없고, 햇살마저 얼음 부스러기 같았다.

이런 날씨에 산정엘 가느니 산 아랫도리나 슬슬 쓰다듬어 보자고 일행들은 합의를 봤다.

통도사를 병풍처럼 둘러싼 영축산의 아랫도리 해발 400~500고지를 꿩 새끼처럼 종종걸음으로 훑었다.

 

 

 

 

조대장님과 후미(산들뫼)를 빼면 5명 모두 나와 동갑내기.

옛날 같으면 벌써 뒷방으로 물러날 나이에 한겨울 산을 6시간씩 걷다니 참 대단한 체력들이다.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오룡산이 바싹 다가온다.

 

 

 

 

항아리 속 된장처럼 / 이재무

세월 뜸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 / 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햇장이니 갑갑증이 일겠지 / 펄펄 끓는 성질에 / 독이라도 깨고 싶겠지
그럴수록 된장으로 들어앉아서 / 진득허니 기다리자는 거야
원치 않는 불순물도 뛰어들겠지 / 고것까지 내 살(肉)로 품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간과 허파가 녹고 / 내장까지 다 녹아나고
그럴 즈음에 /  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 / 식탁에 오르자는 것이야  

 

 

 

 

낙엽에 푹푹 빠지면서, 조릿대에 얼굴을 긁히면서, 쉬임없이 걸었다. 너무 추워서 쉴 수가 없었다.

잠시 길이 편해지면 재잘재잘 깔깔깔. 앞서 가던 조대장님이 묵직하니 한 마디 한다.

"산길이 편해지면 길이 시끄러워지는겨!" (사는 게 팍팍해봐라, 잡생각이 나나!)

 

 

 

 

지산마을 뒤 영축산 아랫도리를 더듬어 비로암 뒷쪽으로 내려오니 극락암과 만나졌다.

동안거에 든 고요한 산사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홍시를 주워 먹는 맛이란!

 

 

 

 

요즘 지역마다 둘레길이 유행이던데 통도사 환종주 코스도 훌륭한 트레킹 코스로 생각된다.

석계재에서 길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아주 멋진 둘레길을 걸을 수 있다.

부속 암자만도 14개를 거느린 큰 가람 통도사와 독수리가 날개를 편듯한 영축산을 한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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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을 보고 온 날은 밤새 잠을 설친다.

깍아지른 절벽 중간으로 실뱀처럼 나있는 저 길은 험준한 산과 아찔한 협곡을 잇는 차마고도를 닮았다.

 

 

 

 

넓고도 좁은 게 세상이라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옛친구와 산길에서 만난 두 사람.

신혼시절 한 동네에서 살았다는데, 그 두 사람을 내가 만나고 있었는데도 여태까지 서로 모르고 지냈다.

그러니 매사에 때가 있는 게 맞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난다.

 

 

 

 

사자평에서 표충사로 내려오면서 저 길을 몇번이나 걸었는데,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간담이 서늘하다.

길 위에 있을 때는 위험도 스릴도 못 느꼈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아찔하기 이를데 없다.

우리가 건너온 세월도 저런 구간이 있었지. 지나고 보니 참 운이 좋았다 싶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야!

 

 

 

 

눈으로 보는 것만큼 사진이 잘 표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자꾸 사진에 욕심을 내게 된다.

오늘같이 청명한 날, 시간만 넉넉하다면 순광을 기다렸다가 저 길을 제대로 찍어보는 건데... 아깝다!

 

 

 

 

표충사에서 진불암으로 올라 재약산 정상과 사자평 가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문수봉을 만난다.

전망대 너머 가운데가 문수봉, 맨 끝이 관음봉. 햇살에 실핏줄이 드러나는 나무, 나무, 겨울나무들.

 

 

                                                                                     

 

1대간9정맥을 끝내고, 국내의 웬만한 산도 다 밟아본 친구가 "설악산 빼고는 우리나라에서 영남알프스가 제일 좋더라." 했다.

릿지, 협곡, 하다못해 억새평원까지 골고루 갖춘 곳. 누구 말마따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영남알프스!

 

 

 

 

암벽이 현란해 눈을 뗄 수가 없다.

잎새 무성한 여름이나 화려한 단풍도 좋지만 이렇게 다 벗어버린 겨울산도 얼마나 멋진가.

화장기 없는 얼굴처럼, 가식없는 사람처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겨울산이여!

 

 

 

 

진불암 왼쪽 멀리 푸른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있는 사자봉.

빈 암자에 장작불 때고 하룻밤쯤 묵어가고 싶다. 부처님 집인데 설마 귀신이야 나올라구?

 

 

 

 

올해 연말은 어느 해보다 마음이 가볍고 즐겁다. 버릴 건 버리고 잊을 건 잊고 품을 수 있는 건 사정없이 품기로 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정신세계에도 작용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니까.

  

 

 

 

살아온 세월은 다르지만, 타고난 성품은 다르지만, 오늘 이 산 위에서 우리는 한 마음이다.

남은 세월 좀 더 아름답게 살고 싶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싶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친구로 남고 싶다.

 

 

 

 

관음봉 바위 능선 아래 저 멀리 표충사가 보인다.

영남알프스 일대를 그렇게 누비고 다녔어도 문수-관음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조망이 이렇게 아름다운줄 몰랐다.

 

 

 

 

"아들이 내 인생에 1순위였는데, 아들에게도 내가 1순위인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 이제 내 1순위를 아들 1순위한테 양보해야겠지?"

자식에게 인생을 걸었던, 자식이 희망이었던, 이 시대 수많은 어머니들의 그 허탈감을 친구는 지금 느끼고 있다.

머지않아 나도 그런 상실감을 느끼게 될까.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다는데.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곰곰 생각해보니 사랑이었다.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이 없어서 우리는 지금 허전하고 쓸쓸한지도 몰라.

누구 말처럼 많이 베풀고, 돌아올 것은 생각지 말아야지. 그래야 곱게 늙는 거란다.

 

 

 

 

하산해서 올려다본 문수봉, 관음봉(오른쪽)

생각지도 않은 만남에, 기막힌 루트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산행이 될것 같다.

 

 

 

 

 재약5봉(필봉-사자봉-수미봉-재약봉-향로봉)의 첫 봉우리인 필봉이 위풍당당하다.

표충사를 감싸고 도는 재약5봉 코스를 다시 밟을 수 있는 날이 올까?

 

 

 

 

 하늘 아래 무구한 하루가 갔다.

총체적 부실의 몸뚱이로 이만큼 걸을 수 있어 다행이고, 몸보다 마음이 더 상했던 시간도 다 흘러갔으니 홀가분하다.

 

 

 

 

 

<이 토끼는 T.V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온 적이 있는데 예불할 때마다 법당 앞에 와서 다소곳이 앉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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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손 내밀기를 잘했지. 암, 잘했구말구. 

너를 만나러 가는 내내 안온하고 행복했다. 지난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했다.

충고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우리 나이, 더 이상 서로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모처럼 시야가 확 트인 하루, 금정산 주능선에서 멀리 해운대 장산이 보인다.

묵은 친구가 이래서 좋은가 보다. 1년만의 만남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편안했다.

 

 

 

 

"새록새록 니 생각이 나더라. 니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난 왜 니 정성을 그리도 몰랐을까?"

"너도 나한테 잘했잖니. 사실은 내가 너한테 푹 빠져있었지."

"그런데 나는 너에게 받은 것만 생각난다. 내가 해준건 아무 것도 없는것 같아. 그래서 더 미안하고 괴롭더라."

"일생을 통해 너한테만큼 정을 준 친구가 없었다. 언제나 니가 내 빽이라 생각하고 든든했었다."

 

 

 

 

우리는 정상에서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가에, 입가에, 서서히 주름이 짙어지는 중년의 얼굴...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금정산 상계봉 바위능선을 넘어서자 발 아래 낙동강과 화명동, 저 멀리 토곡산이 다가왔다.

동문-남문-서문-북문으로 금정산 종주를 했던 게 몇년 전이던가.

남문 근처에서 마신 막걸리 한 사발에 발걸음이 헛놓이던 기억이 난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내 친구라는 핑계로, 나는 너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와 충고를 했던가 보다.

내 가치관으로 너를 묶을 필요가 없건만. 내 기준으로 너를 단죄할 자격도 없건만.

지나고 보니 그 또한 욕심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인정했어야 했는데...

 

 

 

 

 30년 넘는 세월 널 잊은적 없었다. 헤어져있는 동안에도 늘 생각했다.

언제나 너를 독점하고 싶었고, 그래서 질투하기도 했고, 배신감으로 가슴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다 양보할 수 있다. 네가 행복하다면 어떤 것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

 

 

 

 

상계봉을 배경으로 해바라기를 즐기는 만삭의 흑염소.

경계심을 버리면 매사가 편하다는 걸, 염소의 굼뜬 동작에서 느낀다.

선입견, 피해의식, 독점욕. 그런 것들만 버려도 인간관계가 훨씬 편안해질텐데.....

 

 

 

 

누가 뭐래도 네 인생은 너의 것!

이제 너에게 어떤 쓴소리도 하지 않을게. 너에 대한 욕심을 버릴게. 그게 진정한 우정이란 걸 깨달았어.

 

 

 

 

외로울 때, 슬플 때, 네가 혼자 오곤 한다는 석불사 바위 능선도 잊지 않을게.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을 넓게 가졌더라면 너를 포용할 수 있었을텐데. 너 혼자 산을 헤매도록 놔두지 않았을텐데.

미안하다, 친구야. 정말 미안하다!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도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도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김용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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