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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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여행기 (2)
IP : 211.210.224.30   글 작성 시각 : 2004.08.04 16:32:44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아무 데서나 잘 자는 사람이다.
산속이나 버스 안이나 등만 대면 자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운지.
올 여름 여행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도 잠자리였다.
지도를 보며 여행하다가 밤이 되면 가까운 모텔을 찾곤 했는데
무더운 날씨 탓인지, 관광지 인심 탓인지 마음 편히 자보질 못했다.
단 하루, 조용하게 단잠을 잔 건 천관산 아래 천관모텔.
늦은 밤 낯선 길을 헤매다가 발견한 모텔이라
선택의 여지도 없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투숙객이 없어 조용하기만 했다.
하긴, 이렇게 찌는 날 등산객들이 있을 리가 있나.
뒷날 아침, 네 식구의 빨래를 손세탁해서 옥상 위에 널어놓고
“산에 갔다 와서 빨래 걷어 갈게요. 방은 지금 비우고 갑니다.”
호기롭게 출발, 호남의 5대 명산(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이라는
천관산을 올랐다. 해발 723m, 온 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능선 부위에 삐죽삐죽 솟은 기암괴석들이 천자의 면류관 같다고
천관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7~8년전 가이드 산행으로 따라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산도 물도 여전하다. 변한 게 있다면 내 마음이랄까?
성철스님의 유명한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깊이 생각한다.
사물의 본질을 똑바로 보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언제나 사물의 본질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찾곤 한다.
장천재에서 연대봉 가는 길은 숨이 탁 막히도록 가파르고 힘들다.
고온다습한 날씨가 여름 등반으로는 악조건이다.
양근석, 정원석 등 이름도 다양한 기암괴석들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김유신의 옛 애인 천관녀가 숨어 살았다는 천관산.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관녀를 단념하기 어려웠던 김유신.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려고 했는데
어느날, 말 위에서 잠든 유신을 태우고 애마가 천관녀의 집 앞에 이르렀다.
잠이 깬 유신은 자신도 몰래 애마가 여자의 집에 이른 것을 알고
단칼에 말 머리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픽션이라도 너무 잔인한 얘기 아닌가?
한때 그리도 사랑했다면서 그리도 잔인하게 사랑을 끝내야 했을까?
‘깊이 사랑한 사람이 가장 깊은 상처를 준다.’

정상을 빤히 바라보면서 올라가다가 너무 더워서 웃통을 벗는다.
벗은 옷을 꽉 짜니 물이 주르르 흐른다. 온몸이 땀이다.
천관산 정상은 연대봉(723m)으로 봉수대 모양이 남아있다.
날씨 좋으면 남쪽으로 한라산이 신비하게 나타난다는데
구름 많은 하늘 탓인지 한라산은 보지 못했다.
북쪽으로 영암 월출산 무등산으로 추측되는 산이 보이긴 한다.
정상석 부근에는 색깔도 고운 원추리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다.
지친 산길에서 가끔 이런 야생화를 만나면 온몸에 생기가 돈다.
살아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이와 같다.
좋은 친구의 말 한 마디, 사랑한다는 고백, 어린 자녀의 재롱.
그렇게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삶이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길가에서 문득 만난 야생화처럼
참으로 작은 것들이 우리 마음에 큰 위로를 준다.
정상석 뒤에 몸을 가리고 세미누드로 기념촬영을 했다.
정상에서 환희대까지 4Km는 광활한 억새밭.
우리 동네(영남알프스) 신불평원이나 사자평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5만여 평의 억새밭이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장관을 이룬다고.
능선길을 걸으면서 영화 ‘가시나무새’의 마지막 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사랑했던 여인의 관을 묻으러 언덕 위를 걸어가는 신부님.
롱샷으로 잡은 라스트씬과 주제곡이 너무 슬퍼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환희대를 정점으로 우리는 하산길로 접어든다.
올라올 때부터 배가 아프다는 아들아이 때문에 발걸음이 바쁘다.
금강굴 쪽으로 내려와 원점회귀하니 4시간이 지났다.
긴 산행은 아니었지만 힘들었다. 역시 여름 산행은 체력이 있어야!
하산해서 빨래를 걷으러 천관모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빨랫줄 가득 널어두고 간 4식구의 옷가지가 사라져서 주인을 찾았더니,
“아까 소나기가 와서 걷어놨당께~”
아줌마는 4식구의 옷가지를 가지런히 개켜 방안에 두었다.
시골 인심이 이래서 좋구나. 방값도 싸고, 조용하고, 빨래까지 걷어주니.



초행길의 시골마을 ‘관산’읍내를 걸어 병원을 찾았다.
아들아이는 ‘급성 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제 녹돈 삼겹살로 저녁 먹은 후부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단다.
녀석의 평소 식성을 보건대 차돌도 거뜬하게 삭일텐데
역시 무더운 날씨의 강행군이 문제였나 보다.
그래도 최소한 열흘에서 2주 정도로 잡은 여행 스케줄을 바꿀 순 없다.
관산에서 영동으로 나와 강진의 고려청자도요지를 찾아간다.
“진짜 여행은 지금부터다. 강진은 남도 답사 1번지란다.”
아이들에게 주지를 시켰지만 녀석들 표정은 심드렁하다.
도암만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다가 경치 좋은 전망대에 차를 멈춘다.
풀을 베던 아낙들과 나그네 한 사람이 한가롭게 그늘을 즐기고 있다.
목포에서 얼음공장을 한다는 남자는 인력이 모자라
자신이 직접 8톤 트럭으로 얼음배달을 갔다 오는 길이란다.
해박한 지식에다 청산유수 같은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말 들어보니 전국 곳곳 안다닌 데가 없을 정도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에 새까만 눈썹이 평범한 사람 같지가 않다.
팔영산 산신령처럼 그 또한 ‘목포의 조르바’일까?
회사와 집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샐러리맨에 비하면
그들의 사유는 얼마나 깊고 또 넓을까? 조금은 부럽고 질투난다.
비행기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행기의 빠르기만큼
세계가 좁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람의 행동반경이 생각의 틀을 이렇게 바꾸어놓는 것이다.

고려청자도요지로 가는 길은 강, 바다, 산이 조화로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유홍준 교수가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로 명명한 이후
강진은 자연스럽게 서정시의 고향이며 남도 답사의 대표격이 되었다.
강진군 내 입간판이며 프랭카드, 조형물에 모두 ‘남도답사 1번지’를
강조하고 있어 지역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전라도 지방은 문화에 대한 마인드가 다르다.
개발 위주가 아닌 보존 위주, 파괴 위주가 아닌 보호 위주.
세계적인 문화유산 반구대 암각화를 놓고 울산시가 벌이고 있는
사업을 보면 전라도 쪽과 많이 비교된다.
강진에서 마량항 쪽으로 바다를 끼고 30여분 달리면 고려청자도요지와 청자 박물관이 있다..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우리나라 중세 미술을 대표하는
고려청자의 생산지로서 가마터만 200여 기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급, 보물급 고려청자 40여 점이 모두
강진산이라니 우리나라 도자기 생산의 본바닥임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은은한 비취색 몸매에 유려한 선. 화려한 듯하면서도 튀지 않는 매력.
강진에서 청자 문화가 유난히 발달했던 이유는 여러가지
사회적 여건과 자연환경 덕분이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통일신라 후기의 해상 교통 발달로 인해
중국의 청자 문화 도입이 빨랐으며 수송로가 트여있었다.
강진 일대에서는 도자기 재료인 고령토가 많이 나왔고
산이 많아 도자기를 구울 때 쓰는 연료를 조달할 수 있었다.
청자박물관에 들러 청자의 역사와 제작과정을 둘러보고 옛가마터에서
불 때는 모습도 구경했다. 초벌구이가 끝나고 유약을 바른 도자기들이
가마 속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8월초 시작되는 강진청자문화제 때
가마 속의 작품들을 꺼내 경매에 붙일 거라고 한다.
코 앞에 다가온 축제 준비로 강진군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다.
여행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한번 더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청자골 강진’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 고장, 강진이 마음에 든다.


강진 읍내로 나와 모텔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무슨 체육대회가 있다나 해서 읍내 모텔에 방이 없다.
영랑생가 근처 골목에서 방 하나를 잡고 쓰러지듯 누웠다.
무더위에 피곤이 겹친 데다 아픈 아이가 있으니 신경이 날카롭다.
아들은 자꾸 배가 아프다고 한다. 허리를 구부리고 펴질 못한다.
아무래도 여행 스트레스가 심한가 보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땅끝 보길도까지 가자니 불안하다.
의료시설도 어떤지 모르겠고, 섬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생길지...
“내일도 계속 아프면 집으로 돌아간다, 오케이?”
아빠가 결단을 내린다. 나는 마지못해 수긍한다.
얼마나 별렀던 여행인데 4박5일만에 돌아가다니? 속상하다.
“너희들은 아빠랑 집에 가고, 엄마 혼자 여행 좀 다니다 돌아가면 안될까?”
나 혼자라도 당초 예정 코스대로 다 밟아보고 싶다.
두륜산, 보길도, 진도, 월출산, 운주사, 담양....
입사 20년만에 모처럼 긴 휴가를 받았는데 이렇게 돌아갈 순 없지.
“4년만 기다려. 그때는 진수가 대학교 가니까 우리끼리 다시 오자.”
어린아이 달래듯 남편이 위로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어둡다.
켜면 시끄럽고, 끄면 더운 구닥다리 에어컨과 함께 하룻밤을 자고
뒷날 영랑생가를 보러 갔다.
‘북에는 김소월, 남에는 김영랑’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영랑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했고
‘모란이 피기까지는’등의 시로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토속적인 언어로 순수 서정시의 경지를 개척한 영랑(김윤식).
그의 생가는 본채와 사랑채 2동이 남아있는데 뜨락에 모란이 풍성하다.
상량문을 보니 건립연대는 1906년, 거의 100년을 버텨온 건물이다.
사랑채에 영랑이 시를 쓰는 모습이 실물같은 인형으로 앉아 있다.
유명 작가의 생가를 보존하고 그의 업적을 홍보하는 건 좋은 일이다.
이런 일 역시 문화적 마인드가 없이는 곤란하다.
외국에는 워싱턴 스퀘어나 링컨 센터처럼 유명 정치인의 이름을 딴
시설물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것 같다.
하긴 역대 대통령 중에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 있어야 말이지.
영랑생가에서 링컨센타로... 내가 비약이 너무 심했나?
“아무리 네가 배가 아파도 강진에 온 이상 다산초당은 봐야 안되겠니?”
백련사 가는 길에 아들아이를 달랜다.
절입구의 동백숲이 이채로운 백련사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백련사 동백이 보통 동백인가? 높이 5미터 넘는 건 보통이고
10여미터에 가까운 거목도 있다.
백련사 주위에 자라는 동백이 1500그루 이상이라니 봄날이 얼마나 황홀할까?
하지만 한여름 뙤약볕 아래 백련사에는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었다.
만덕산 기슭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불과 3Km,
동백나무 숲을 지나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가면
정약용이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왕래했던 흔적을 느낄 수 있을까?
아이들만 아니라면 걸어서 다산초당까지 갔다오련만... 안타깝다.

사는 곳 정처없이 안개노을 따라다니는 몸
더구나 다산이야 골짜기마다 차나무로다
하늘 멀리 바닷가 섬에는 때때로 돛이 뜨고
봄이 깊은 담장 안에는 여기저기 꽃이로세
(중략)
못과 누대 초라해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정약용>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지내면서 처음 지었다는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초당을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손수 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수를 만들고
동암, 서암 2개의 암자까지 만들었다.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정자였던 이 초당에서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 18년 중 10년을 보냈다.
10년동안 지은 책만도 목민심서를 비롯해 500여권이라니
요새 말로 하자면 감옥살이 하면서 저서를 낸 게 아닌가?
귀양살이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한세상 잠시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그는 후학을 가르치고
책을 썼을 것이다. 참으로 긍정적인 사람이다.
입구에서 다산초당까지 가는 길이 산길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반질반질 시멘트를 바르거나 인조계단을 깔지 않아서 다행이다.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한답시고 문화재 주변마다 시멘트를 바르는 게
나는 싫다. 문화재 복원을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옛것을 남겼으면 싶다.
흙을 밟고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옛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어야지
차를 타고 와서 몇 발자국만 걸어 사진 한 장 찍고 돌아가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을까?
유홍준 교수는 ‘아는 만큼 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관심이 있으면 깊이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볼수 있다는 말이다.
눈 앞에 있어도 아는 게 없으면 보지 못한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대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 여태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대상을 보면
보는 안목이 달라지고 생각의 깊이가 달라진다.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느낀다. 사랑하면 저절로 보인다.

<2004년 8월3일>

출처 : 비공개
글쓴이 : 익명회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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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루 동안 내리던 비가 딱 그치자 도로는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다.
모처럼 갠 주말, 그 누가 떠나고 싶지 않으리.
지체와 서행을 반복하며 7시간만에 닿은 금산사는 배고픈 길이었다.
절 입구 민박집에서 밤 10시에 저녁밥을 먹기까지 우리는 흥부 자식들처럼 밥이 그리웠다.
이몽룡이 거지꼴로 월매를 찾아와 밥을 청한 뒤 '밥아, 너 본지 오래다'하고 허겁지겁 먹었다는데, 그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것 같다.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식사 후 주최측에서 마련한 짧은 역사 강의가 있었다.
최근에 나온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신정일 선생. 내일 답사에 대한 스터디로 동학혁명에 대한 얘기를 진지하게 쏟아놓는다.
암울했던 시대 민중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준 동학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신선생 얼굴 위로 문득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이 겹친다.
어릴 때부터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울분이 용솟음쳤다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셨다는 조정래 선생님.
그 다짐이 '아리랑'이 되고 '태백산맥'이 되었듯이 신선생의 역사관 또한 억울하게 당하고 살아온 민중들에 대한 천착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재야사학자로 분류되는 그는 1년에 책을 3권이나 냈다 한다. 그 해박함과 순수한 열정이 듣는 사람을 감동케 했다.

뒷날 새벽, 호남 제일의 고찰 금산사 새벽 예불을 보러 가는 길. 몇 광년을 달려온 별빛은 동자승의 눈빛처럼 맑고 초롱했다.
이 깊은 산 속에 유폐되었던 후백제 왕 견훤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도량석이 시작된 새벽의 금산사에서 어제 밤 우리가 달려온 길이 옛날에는 얼마나 더 멀고 험하였을까 생각했다. 전조등 불빛에 구불구불 드러나는 산길을 끝도 없이 달려오면서 맞은 편에서 오는 차량을 만나지 못했음을 상기했다. 과연, 왕을 유폐시킬 만큼 멀고 험한 길이다.

미륵신앙의 본산 금산사는 질곡의 역사를 힘겹게 살아온 민초들에게 정신적 지주였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벌판으로 달려갈 때 현대식 화포와 총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달랑 죽창 한자루 들고도 두려워 않았던 그 용기의 원천이 미륵신앙이었다.

신도들을 따라 대웅전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미륵전을 배알했다.
우리나라에서 하나 뿐인 3층 목조 법당 미륵전은 통층으로 지어진 내부가 특이하다. 무거운 기와지붕을 지탱하면서 높이를 유지하려니 대들보가 두 아름씩 넘는다.
낡은 단청이 퇴락한 고찰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듯하다. 번쩍이는 동기와에 시멘트를 처바른 요즘 절보다 얼마나 멋스러운가.

도량석이 끝난 뒤 스님은 법고를 치고 대종을 울린 뒤 목어를 때리고 운판을 울렸다. 목숨 있는 것들은 물론 무간지옥의 귀신들까지 구제한다는 저 소리.
대웅전에서는 깊은 강이 흐르듯 조용한 염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배롱나무 아래서 듣는 금산사의 새벽 예불 소리는 음유시인들의 낮은 합창 같다.

미륵의 절 금산사를 둘러보고 돌아서는 발길이 어쩐지 무거웠다. 지금부터 돌아볼 곳들은 역사적 아픔이 서리서리 배인 동학 농민운동 관련 유적들이기에.
전봉준의 사진과 친필이 모셔진 구리골 동곡약방과 금평저수지 너머 동학의 격전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자신의 역사지식이 너무나 얕은 것을 속으로 책망했다.
길 양쪽 해바라기가 심어진 풍경 속으로 전봉준의 고택을 둘러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라도 쪽으로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도로가 참 한산하다는 생각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역사적인 소외가 차라리 축복으로 느껴지는 땅. 슬프게도 아름다운 전라도.
동학혁명의 원인이 됐던 만석보 터 기념비 앞에서 배들평야를 보며 대리석에 새긴 양성우 시인의 '만석보'를 읽었다. 불과 1백여 년 저쪽의 피맺힌 역사가 가슴 아프기 보다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무지몽매한 역사가 더 서글퍼 눈시울이 뜨겁다.

무늬 없는 질그릇처럼 소박한 얼굴의 신정일 선생과 헤어져 우리는 연꽃축제가 열리는 무안으로 달렸다. 무안군 일로면으로 진입하는 아스팔트 위에는 흰 페인트로 '연꽃'이라는 글씨가 쓰여있어 '연꽃 즈려 밟고 가는 길'의 낭만이 벙글었다.

대개의 우리나라 축제가 그렇듯이 무안 연꽃축제도 조악한 느낌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이야 그렇다 치고 연못보다 더 넓어 보이는 먹거리장터와 거기서 울리는 요란한 음악 소리. 국적불문, 장르불문의 노래가 백련지를 뒤덮고 있다.
10만평의 못에는 드문드문 하얀 연꽃이 심청이 소복처럼 피어나고 연못가에 가시연, 개연, 노랑어리연, 수련, 물양귀비... 갖가지 물꽃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동양 최대의 백련 서식지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회산 백련지가 안쓰러웠다.

에어컨이 고장난 버스 속에서 공짜 사우나를 즐기며 우리는 다시 화순 땅을 밟았다.
'천불천탑이 천만 개의 돌등을 들고 나와 맞는다 해도,
그게 다 마음 덩어리 아니겠어?'
시인 황지우의 '구름바다 위 운주사'를 떠올리며 절 입구로 들어서는데, 풀밭 위에 편안하게 앉은 부처님, 자연석 앞에 기대 선 부처님들이 스스럼없이 나를 맞으신다. 석실에 등을 맞대고 계신 부처님 두 분은 미소까지 지으신다.

입체가 아닌 평면불상에다 원반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린 탑.
자연석을 기단으로 쌓은 탑에는 천전리 각석에서 보았던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있고 불상의 얼굴 또한 지금까지 익히 보아온 근엄한 표정이 아니었다.
학계의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작품이라고만 추정되었될 뿐 아직도 정확한 유래가 밝혀지지 않았다 한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몽고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화순 인근에 주둔했던 몽고군이 그들의 안녕과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석탑과 불상을 조각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군데군데 일으켜 세워놓은 불상을 보며 제주 돌하루방 얘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에 수많은 우리의 어머니들은 애비 없는 자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성도 이름도 심지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돌에 새겨 자식들에게 묵시적으로 가르쳤다. 네 애비는 이렇게 생겼느니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부끄러운 역사가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을 것인가.
탑을 쌓은 사람이 누구이건, 와불을 새긴 사람이 누구이건 형상을 지닌 것들은 비바람에 마멸되겠지만 돌에 새긴 그 불심만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으리.

수많은 사람들이 운주사를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너무 늦게 왔구나.
한 걸음 늦게 출발한 마라토너처럼 늦깎이 인생을 살고있는 나에게 운주사는 또 다른 비애를 느끼게 해주었다.
와불(미륵)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운주사.
늦가을 운주사에 다시 가고 싶다.
잎 떨어진 산기슭 아래 마른 풀숲에서 그때도 석불은 편안하게 웃고 계실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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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항아리를 수집하는 친구 따라 문득 길을 나선 3월의 끝날. 무작정 나선 길은 벌교-보성-장흥까지 돌아오자는 계획으로 합의를 보았다.
태백산맥의 현부자집을 찾느라 진트재를 두 번이나 넘나들고 뻘 밭에서 자란다는 짱뚱어탕으로 요기한 뒤 다다른 곳이 보성 차밭.
봇재에서 굽어보는 차밭과 저 멀리 저수지의 풍경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
누가 이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해 차밭을 만들고 방풍림을 조성했을까? 녹차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차밭은 점점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 맞은 편 산도, 저 건너편 산도 차밭으로 변모하고 있다.
차나무에는 연초록 새순들이 이제 막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데 머지않아 인근 부녀자들이 몰려들어 차잎을 따기 시작하리라.
곡우 이전에 딴 차를 '우전'이라 하여 최고로 치는데 올해는 4월 20일이 곡우다.
보리밭 고랑처럼 경사진 산비탈에 재배되고 있는 차나무들은 능선을 따라 굽어진 곡선을 이루고 있다.
햇볕을 많이 받은 쪽은 새순이 올라와 연두빛이 완연하고, 다른 쪽은 작년에 깎은 머리모양 그대로다. 막 이발을 마친 소년같다.
햇볕을 따라 성장하는 식물들처럼 사람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건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줄도 아는 것이다.
승용차 뒷좌석에 겨우 들어가는 항아리 2개를 사 가지고 순천만으로 차를 몰았다.
물이 빠진 갯벌에는 군데군데 뻘투성이의 여인들이 삶을 기워나가고 있다. 그들에게 갯벌은 생활의 터전이고, 삶의 전장이다. 수평선까지 아득하게 밀려나가는 바닷물을 낭만적으로 바라볼 정신적 여유는 없으리라.
광양으로 나오다가 문득 매화마을에 들러보기로 한다. 옥곡에서 매화마을까지 길 양편으로 온통 매화나무다. 봄 한철 매화로 뒤덮인 산간마을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렌다.
섬진강을 굽어보는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에는 1500개의 항아리들이 사람을 압도한다.
매실의 효능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알을 낳지 못하는 늙은 닭에게 매실 찌꺼기를 사료로 먹였더니 얼마 후부터 알을 낳더라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세포 부활에 뛰어난 효능이 있는 매실을 엑기스, 술, 차 등으로 상품화하는 곳이 청매실농원이다.
나선 김에 하동 쌍계사까지 다녀오려다가 강변을 드라이브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쌍계사 10리 벚꽃길은 여고시절 아름다운 추억이 묻혀있는 곳. 털털거리는 버스 타고 화개에 내려서 타박타박 비포장도로를 걸어가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춤추듯 떨어져 내리던 꽃잎. 아름드리 벚나무 고목들은 해마다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많은 꽃을 피웠는데...
'토지'의 무대 평사리 최부자집도 생각나고, 태백산맥 염상진의 아픈 세월도 생각게하는 봄날의 여행.
박경리의 토지가 허구인데 비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철저한 답사와 고증의 산물이라는 것에 비중을 두고 생각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각은 이미 우리가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를 넘기고 있었다.
고속도로변, 조팝나무가 하얗게 흔들리는 모습이 경이로워 차를 멈춘다. 라일락도 피고, 등나무 꽃도 보랏빛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바라본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유유자적 흘러간다.
"안타까워 말아요. 흐르는 강물처럼... 사는대로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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